무등산이 도립공원에서 대한민국 21번째 ‘국립공원’으로 승격됐다. 무등산 국립공원은 수십 개의 능선과 기암괴석이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곳이다. 하지만 군부대 때문에 통행이 제한돼 등산객들은 이 멋진 풍광을 먼발치에서만 볼 수 있었다. 국립공원 승격으로 정상 개방이 간헐적으로나마 적극 추진된다. 무등산 국립공원은 가벼운 마음으로 ‘워킹’하면서 자연의 오묘한 정취를 감상하기에 아주 좋은 산이다. 자연을 벗 삼아 사박사박 걸으면 무등산 산장에서 정상까지 3시간, 증심사에서 정상까지 4시간이 소요된다.
따사로운 태양을 짊어지고 산을 오르는 동안 산마루 넘어가는 흰 구름을 쫓아 마음을 움직인다. 좁거나 굴곡진 산길을 따라 올라서면서 밝은 마음으로 세상을 대하는 다짐의 시간도 갖는다. 그럴수록 무등산은 더욱 넓은 마음으로 세상을 맞이하려는 듯 연둣빛 신록으로 번지며 흥타령이 한창이다.
산사와 골짜기를 관통하는 시원한 산바람이 굽어진 산허리를 휘감으며 천지를 흔들었다. 거대한 존재로부터 스스로 흘러나오는 바람은 솔잎 사이로 쏟아지는 햇빛, 초봄의 산을 각색하는 온갖 피조물들, 업으로 쌓여 있는 인간의 육체와 부딪치며 청아한 소리를 만들어냈다. 귓불을 때리는 장엄한 이 소리는 나에게 따뜻한 생명의 노래를 선사했다. 생을 다하고 나서야 치유할 수 있을 것 같은 삶의 상처를 현실 속에서 정화하고 달래주는 것은 역시 대자연인가보다. 자연은 생명이자 삶의 희망을 주는 존재다.
희망이란 언제 찾아올지 모를 그리운 사람과 같다. 늘 기다려지고, 아프고, 힘겨워도 그와의 만남을 기약하며 살아가기에 삶의 상처를 끌어안을 수 있다. 그러나 희망은 맘속의 간절함만큼이나 자신 앞에 투명하게 보이는 것이 아니다. 생이 다할 때까지 나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비록 희망이라는 정체가 묘연하고 불투명하더라도, 참을 수 없는 현실이 고통스럽게 괴롭히더라도, 소중한 것을 잃어 자포자기하고 싶더라도, 희망을 놓지 않으리라. 아주 늦게나마 희망이라는 것이 찾아올 때, 꼭 그것이 아니라 희망에 가까운 것이 눈앞에 보일 때 놓치고 싶지 않다.
소박하고 단아한 교외의 풍경을 지나 거칠고 좁은 등산로에 들어섰다. 우거진 숲과 바위에 부서지는 빛과 바람소리가 대자연의 장대함을 연출했다. 여럿이 어울리면서도 고요와 요동치기를 반복하며 무언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채 펼쳐져 있었다. 이 풍경은 예전부터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낯이 익고 고향을 찾는 사람의 마음처럼 편안했다.
나는 이날, 무등산만을 사랑하기로 했다. 변함없는 이해와 사랑으로 나를 감싸주길 갈망하기로 했다. 맘 깊은 곳에 숨겨진 연민의 창도 활짝 열어 놓기로 했다. 시끄럽게 흔들리며 사는 나를 늘 기다리고 있는 어머니처럼 안아주었기 때문이다.
용추계곡을 허리에 두르고 새인봉(璽印峰)을 지척에서 바라보며 병풍처럼 펼쳐진 암석들과 그 틈 사이로 숭숭히 내민 억새를 따라갔다. 준평원 위에 외로이 하늘을 향해 손을 뻗고 있는 구릉지, 빛과 바람에 휩싸여 섬세하게 솟아오른 기암괴석을 연출하는 잔구(殘丘). 봄에 막 들어서는 무등산은 눈꽃이 천지를 감싸 안은 호사스러운 설경은 아니지만, 낮에 녹았다가 새벽에 얼기를 몇 차례나 반복한 것인지 고즈넉한 형태와 색으로 꾸며진 고드름과 눈꽃들이 고시대의 예술품을 대하는 것처럼 신묘한 감명을 주었다.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졌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금방이라도 차가운 비가 쏟아질 것 같은 검푸른 먹구름이 갈라지고 무리지길 반복했다.
나는 언제부턴가 모든 사물에 대한 본질을 들여다보는 것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하나하나 주위를 면밀히 바라보면서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내면의 모습과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했다. 고민과 갈망이 거듭될수록 그것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매서운 바람 몰아치는 산사의 풀 한 포기에도, 이리저리 엇갈리기를 반복하며 흐르는 계곡 물속의 작은 돌멩이 하나에도, 근원적으로 아름답고 가슴을 설레게 하는 빛과 소리가 있었다.
인간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였다.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의 사회적인 의식은 잠재된 무의식 속의 진실들을 더 나은 사회적 삶을 위해 은폐하고 조작했다. 그리고 사회적 삶을 위해 형성된 거짓들을 무의식의 세계에 주입시키고 조정했다. 인간의 행동을 결정짓는 의식은 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진실을 통제하고 또 필요에 의해 스스로에게 거짓을 하도록 지시하는 것이었다.
쉽게 말하면 우리가 사는 사회적인 삶은 자기가 자신에게 스스로 거짓을 할 수 있도록 면죄부를 수여받았고, 이로 인해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이 유연해지도록 운명 지어졌다. 그래서 그것이 꼭 나쁘거나 불행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자신이 솔직하고 거짓이 없이 세상을 대한다고 말하지만, 사회생활의 필요를 위해 스스로 그렇게 의식화하는 것으로 정말로 솔직하고 정직한 것인지는 어느 누구도 알 수 없다. 자신조차도 말이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자신의 사회적인 삶에 악영향을 미칠 진실들은 말하지 않으며 무의식 속에 더욱 굳게 감추려고 한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사회적인 삶의 허상이다. 진리라는 것, 그것은 시초의 존재론적인 거짓 위에 서있을지도 모른다.
무등산은 무진악(武珍岳), 서석산(瑞石山), 입석산(立石山)이라고도 불린다. 나주평야를 내려다보는 굽이에는 통일신라시대부터 번성해온 명승고적들이 여러 곳 있다. 특히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증심사는 보물 13호인 철로비로자나불좌상과 오백나한전으로 유명하다.
무등산 증심교를 지나 중머리재로 향하는 길목에 한국 문인화의 대가 의제 허백련 선생의 생애와 그림을 전시하고 있는 의제미술관이 있다. 이곳은 긴 기다림의 흔적으로 마모된 예향의 진면목을 느낄 수 있는 문화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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