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초창기 한국영화30선

지옥화 - 신식민지 아프레걸의 몰락, 신상옥 감독 1958년작

이동권 2022. 7. 30. 14:14

영식과 쏘냐 ⓒ한국영상자료원


생각이 필요하다. 함부로 사는 것처럼 보여도 숙고의 시간을 가진 이의 삶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 어지러운 사회라며 한탄만 해서도 곤란하다. 험난한 이 세상이 어떤 이에게는 위대한 배움의 원천이자 사회를 변화시키는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원동력도 되지만, 어떤 이에게는 불평과 불만의 대상이자 자신의 양심을 놓아버리는 계기도 된다.

영화 <지옥화>는 저항할 수 없는 팜므파탈의 매력을 소유한 기지촌 여성을 중심으로 전후 신식민지 사회를 사는 사람들의 의식을 그려낸다. 전쟁은 한 여성을 매몰찬 세상으로 밀어 넣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을 돌아보지 않았고, 쾌락에 도취된 채 아무런 비판 없이 휩쓸려 살았다. 그녀는 끝내 미군에 몸을 파는 삶을 선택했고, 자신의 삶을 정당화했다.

<지옥화>의 주인공은 한국전쟁 직후 멜로물에 자주 등장하는 여성상이다. 그녀는 서구적인 의식과 자유로운 성향, 육체적 매력으로 충만했다. 하지만 전통적인 여성을 부정하는 동시에 미국을 절대적으로 신봉했고, 그들의 폭력을 구원의 대상으로 여겼다. 그리고 아무런 비판 없이 그들의 삶에 뒤섞였다.

영화 말미에 그녀는 단칼에 처단을 당한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전후 한국 사회는 미국의 절대적인 영향 하에 움직였고, 친일세력이 친미세력으로 둔갑해 정사를 농락했다. 그래서 미국은 한국인들에게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지만 민족적 치욕을 안겨주는 매개이기도 했다. 그런 미군에게 몸을 파는 여인을 바라보는 시선은 영화에서도 당연히 좋을 리가 없었다.

우리 사회는 미 제국에 거세된 남성의 자존감을 지켜내기 위해 ‘아프레걸’을 기획했다. 문화예술계도 이러한 담론 형성에 동참하면서 아프레걸을 부정한 여인으로 압박했다. 그 결과 아프레걸은 유교적 가부장제를 거부하는 비윤리적 여성보다 더 나쁜 의미의 여성으로 규정됐다. 이를 테면 미군의 환락에 몸을 팔면서 민족정신을 훼손하는 여성이자 욕망의 화신으로 간주됐던 ‘양공주’가 대표적이었고, 양공주를 가장 강렬하게 묘사한 캐릭터가 이 영화의 주인공 쏘냐였다. 쏘냐는 아프레걸의 저급한 언어와 지나친 성적 묘사, 사회윤리에 반한 인물을 상징했고, 우리 민족에 치욕을 안긴 타락한 여성을 대표했다.

쏘냐는 미군에게 몸을 팔고, 그녀의 애인 영식은 미군 부대 창고에서 물건을 훔쳐 산다. 쏘냐는 과잉된 섹슈얼리티 표출로 마조히즘적인 욕망을 충족한다. 그러나 영식은 훔친 미군의 물건으로 돈을 벌지만 그녀를 통해 일제의 식민 지배가 끝난 뒤 다시 시작된 미제의 식민 지배에 대한 극도의 불안감을 느낀다.

이 영화는 쏘냐라는 인물이 가진 욕망과 감정의 표출을 매혹적으로 그려낸다. 한편으로는 영식을 통해 그녀를 처단하는 이중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특히 쏘냐를 범죄의 원인이자 직접적인 가해자로 묘사해 수치심과 모욕을 극대화시킨 뒤 스스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도록 만든다. 남성의 자존감을 살리는 동시에 아프레걸을 가부장제 사회로 다시 환원시키려는 시도다.

정작 영화 밖 현실은 냉혹했다. 이승만 정부의 미국에 대한 맹신은 기지촌 여성들에게 큰 고통을 안겨줬다. 한국 내 기지촌은 국가로부터 적극적으로 형성되고 관리됐으며, 미군 상대 성매매는 권유되거나 방조되기도 했다.그래서 기지촌 여성들은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겪었고, 사회로부터 기지촌 위안부라는 낙인이 찍힌 채 평생을 살아야 했다.

 

실제 미군 부대 파티 장면 ⓒ한국영상자료원
열차 추적하는 영식 ⓒ한국영상자료원


영식은 기지촌에 살면서 미군부대 창고를 털어 내다 파는 일을 한다. 영식의 동생 동식은 형을 고향으로 데려가기 위해 서울에 왔다가 서울역에서 낭패를 겪은 뒤 다행히 형을 만난다. 영식은 쏘냐에게 큰 건을 하나 하고 시골로 내려가서 결혼하자고 설득한다. 하지만 쏘냐는 영식보다 동식을 좋아한다. 댄스파티가 열리던 날 쏘냐는 영식이 미군부대 창고를 터는 틈을 타 동식을 유혹하고, 두 사람은 강변에서 데이트를 하다 영식에게 들킨다. 영식은 미군 수송 열차를 터는 계획을 세우고, 쏘냐는 동식과 도망가기 위해 영식을 헌병대에 신고한다. 헌병대의 추적을 받은 영식은 간신히 도망쳐 나와 쏘냐를 칼로 찔러 죽이고, 영식은 동식에게 어머니를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총에 맞아 죽는다. 동식은 자신을 좋아하던 양공주 주리와 함께 시골로 내려간다.

이 영화는 그 당시 일반인들이 보기 힘든 풍경으로 몰입을 높인다. 전통적인 여성 역할을 도맡아 했던 최은희는 이 영화에서 쏘냐로 분해 도발적이고 섹시한 이미지를 선보인다. 또 미군 기지촌의 풍경이나 기차 추적 씬, 화려한 미군부대 댄스파티 장면 등으로 영화적 호기심을 이끌어 낸다.

이 영화에는 스토리와 관계없는 미군 부대의 전경이 삽입돼 있다. 제작비가 넉넉하지 못해 실제 풍경을 다큐멘터리 식으로 촬영해 넣은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어색하지 않다. 오히려 이국적이고 유다른 풍경이 주는 묘미가 있다. 특히 신상옥 감독이 미군 부대에 몰래 들어가 실제 파티 장면을 촬영해 넣은 장면은 인상 깊다. 자료적 가치로도 충분한 필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