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선선하다. 가을이다. 한 해의 결실을 슬슬 마무리해 거둘 시기다. 그런데 왠지 가을이 되면 가슴에 쓸쓸함이 스며들고, 쓸쓸함은 일상의 덫이 돼 갖가지 상념을 부른다. 이유는 단순하다. 어느 누구도 곁에 없는 것 같은 절망감, 무엇 하나도 해놓지 않은 것 같은 공허감, 나이가 들면서 더욱 가늠할 수 없는 꿈과 현실의 괴리감 같은 것이 울적한 심정으로 전이돼서다.
그럴수록 책을 많이 읽게 된다. 기묘한 현실 앞에 자신을 추스르게 하는 매개는 책이 최고다. 책은 진지한 사유의 길로 가서 담백하게 자신을 되돌아보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게 한다. 물론 책이 너그럽지만은 않다. 좋은 책은 숯불처럼 서서히, 마음속에 지펴지면서 부끄러움을 느끼게 한다. 살다 보면 점점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된다. 꼭 그것이 맞는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면서 다른 생각과 행동을 배제하게 된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 달라진다.
진정 아름다운 삶은 혼자만의 그윽한 성찰이 아니다. 산에 칩거하며 도를 쌓는 것이 세상에 해를 끼치지 않지만, 거기에 머무르면 전진도 없고 세상도 이롭게 하지 못한다. 아름다운 삶은 관계와 소통하며 순회하는 깊이에서 가치를 발현한다. 그 깊이 안에서 서로 보듬는 교감이 이뤄질 때 삶은 동반되고 완성되며 해체된다.
마음에 남는 책은 인문서다. 책의 내용이 훌륭해서가 아니다. 자신만의 좁은 세계에서 벗어나 주위를 둘러보게 하고, 이 세상을 어찌 살다 죽을지 혜안을 주는 까닭이다. 시간을 때우기 위해 보는 책은 그 의미가 상쇄된다. 재밌는 책, 자극적인 책, 공부하는 책, 부자아빠가 되는 책은 한때의 즐거움으로 족하다.
곱씹지 않은 책 읽기는 오히려 판단력을 흐리게 한다. 활자를 머릿속에 쑤셔 넣는 독서는 벽창호를 만든다. 작가 이름만 보고 비판 없이 책을 보는 것도 틀렸다. 무엇이 옳고, 자신의 생각과 무엇이 다른지 비교하고 평가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러면 독자적인 세계관이 형성된다.
경쟁과 시험에 짓눌린 독서는 그것으로 끝내야 한다. 다른 사람과 견주고, 다투며, 경합하듯 보는 책 읽기는 삶의 해로운 양식이다. 입시와 스펙 쌓기를 위해 비좁은 독서실에 앉아 활자를 암기하는 학생들도 짠하지 않을 수 없다.
뭐니 뭐니 해도 가장 많은 지혜는 책보다 사람에게서 얻을 수 있다. 책이 대단한 것을 해결해 주는 양 착각해서는 곤란하다. 책도 어차피 사람이 쓰고 고친 것이다.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맺는 일은 노력과 애정이 필요하다.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을 힘겹고 피곤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럼에도 사람을 만나야 한다. 재밌는 책을 보다가도 사람과 만나야 할 때면 책을 놓고 나가야 한다. 이것은 책을 열심히 보는 보람이기도 한다.
진지하고 담백하게 관계를 맺고 여러 의견을 취하는 만남은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고, 마음 수양을 돕는다. 세상을 살아가는 힘을 준다. 책보다 훨씬 낫다. 하지만 만남을 주고받는 관계, 상대방에게 배우고 얻어야 하는 과정이라고 짐을 지우면 골치만 쑤시다.
가을이다. 기나긴 일상을 잠시 접고 책을 읽는다. 뜨고 지는 해처럼 도도하게 흘러가는 세월을 받아들이고, 어쩔 수 없는 인간으로서의 순회를 거부하지 않으면서 밤새 흐느끼고 싶다. 일상으로 돌아가면 또다시 무거운 울렁거림이 시작되겠지만 그대로 거두겠다. 세상은 우연과 충동질 속에 헤매며, 잘 나고 돈 많은 이들의 그림자를 밟으며 살아가는 곳이지 않나.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거리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생각을 발전시키고 진리를 추구했다. 나도 올해 가을, 겨울, 봄 아니 사시사철 거리에서 사람을 만나 책 얘기를 꺼내보련다. 생각을 잇고, 느낌을 잇고, 관계를 잇는 문화적 유희를 한껏 누려 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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