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개망나니의 사색

040. 겸허하고 진지하게 - 서로 어울려 만든 하나

이동권 2024. 3. 16. 16:31


삶은 관계에서 출발한다.



연평도는 군사지역이면서 안보관광지였다. DMZ와 비슷했으며, 연평해전에서 산화한 영령을 추모하는 평화공원을 비롯해 서정우 하사 전사지, 안보교육장, 연평종합운동장 피격장소, 대피소 등이 해전의 참상을 알려주고 있었다.1)


연평도는 제각각 놀지 않았다. 모든 것이 하나로 보였다. 갖가지 형상과 이름을 가진 것들이 서로 바라보기도 하고 어깨동무도 하면서 연평도를 만들어 냈다. 하다 못해 기형도의 시들마저 어우러지며 하나의 연평도를 촘촘하게 채웠다.2)

 

연평도는 매우 치열하고 뻣뻣한 삶의 터전이었다. 단순한 섬이나 관광지가 아니라 한국인들의 삶의 애환과 아픔이 녹아 있는 곳이었다. 소박하나 광채가 있는 기념비들, 섬세하나 견고한 외관, 어두우나 강렬한 빛으로 반짝이는 색감은 평화를 바라는 소망으로 가득 찼다. 여행을 아름답게 묘사할지언정 연평도를 미화하고 싶지 않다. 한 번 정도 색다른 감흥을 느끼고 싶은 여행객에게 연평도는 제격이다.


나는 뭔가 나은 방향을 찾아가려고 타인과 관계를 맺었다. 나에게 여러 가지 고민과 괴로움을 만들어내는 이유가 되기도 했지만 나는 끝까지 관계를 유지하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결코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는 존재였고, 여러 가지 문제 속에서 삶의 행복을 찾게 되는 경우가 많아서였다.


사람들은 쉽게 결별을 얘기했다. 자신의 생각과 잣대로 삶의 테두리를 그어 놓고 그 선을 넘어오지 못하도록 했다. 관계에 대한 부정, 박대와 무지로 일관하면서 자신의 안녕과 안식을 통해서만 세상을 관망하려고 했다. 그다음에는 불행과 좌절, 갈등과 대립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데 말이다. 우주의 이치와 인간과의 관계, 하나하나가 가진 특성과 아름다움이 연출하는 개연성은 중요하다. 인간이 인간답다는 것도 서로 껴안는 마음을 갖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우리 민족도 언젠가는 하나로 껴안는 날이 올 것이다. 그날을 기다려 본다.3)

 

 

 

1) 연평도에는 평화공원과 등대공원, 군터널, 서정우 하사 전사지, 대피소, 안보교육장 등이 있다. 연평해전이 남긴 게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드는 곳이다. 평화공원은 연평해전에서 산화한 장병들을 추모하기 위해 조성된 공원이다. 이곳에는 탱크와 헬기 등이 전시돼 있다. 등대공원은 연평도 포격사건으로 희생된 넋을 기리는 추모공원이다. 이곳에는 1960년 3월 첫 점등을 시작한 등대가 있다. 군터널에서는 옹진군 명소 사진과 대포가 설치된 곳을 볼 수 있다. 서정우 하사 전사지는 말년 휴가를 떠나다 해전 소식을 듣고 복귀한 서정우 하사가 산화한 것을 기리는 곳이다. 연평도에는 총 24곳의 대피 시설이 있다. 그중에서 7곳은 포격 사건 이후 새롭게 만들어졌다. 평상시에는 주민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된다.


2) 연평도는 시인 기형도의 고향이다. 기형도 시인은 3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나 연평도에서 5살 때까지 살았다. 시인은 자신의 우울했던 유년 시절과 도시인들의 쓸쓸한 삶을 시로 그렸다. 비평가들은 연평도에서 살았던 시절이 그의 문학세계에 많은 영향을 미친 것 같다고 말했다.

 

3) 포탄이 터진 연평종합운동장에 벽화가 그려져 있다. 한반도의 평화가 절실해지는 그림이다. 우리 모두 자기 새끼를 돌보는 어미의 마음으로 살면 싸우지 않을 것이다. 얼마나 귀중한 생명인지 서로 알기 때문이다.


 

일류 기업을 자임하는 삼성의 이미지는 연평해전 이후 낭떠러지로 추락했다. 북한군이 연평도를 포격했을 때 연평도에는 삼성이 만든 6개의 K-9 자주포가 있었다. 해병대는 즉각 대응포격에 나섰지만 3개가 고장 나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1개는 포사격 훈련 중 불발탄이 끼어 사격불능이었고, 나머지 2개는 자주포 근처에 북한 포탄이 터져 사격통제장치의 전자회로에 이상이 생겼다. 삼성은 이후 자체 조사를 펼쳐 강도 높은 책임을 물었다. 하지만 윗사람들은 책임을 지지 않았다. 이 일로 전 국민의 비판은 더욱 거세졌다. 삼성과 관련한 여러 이슈가 도마 위에 오른 상태여서 그랬다. 삼성 반도체가 대표적이었다. 삼성에는 인간이 없고, 박애가 없고, 평화가 없다는 말이 나왔다. 삼성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수없이 죽었다. 삼성은 이들의 병을 개인질병이라고 주장했고, 근로복지공단 역시 산재를 승인하지 않았다. 피해자와 유가족들은 산업재해를 인정받기 위해 근로복지공단과 소송도 불사했다. 하지만 재판장에는 삼성이 고용한 변호사들이 줄줄이 앉아 있었다. 1인 시위, 기자회견, 선전전, 면담요청, 항의방문, 집회. 재판 등 할 건 다했지만 삼성은 수년 동안 모르쇠로 일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