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개망나니의 사색

039. 겸허하고 진지하게 - 자신도 모르게

이동권 2024. 3. 16. 00:07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마을을 빠져나와 연평도에 하나밖에 없는 주유소를 경유해 섬 중앙으로 들어갔다. 오지의 굴곡처럼 뻗어 있는 섬 길이 황홀경에 빠지게 했다. 나는 제멋대로 하늘을 날아다니는 갈매기처럼 그 길을 맘껏 쏘다녔다. 짓눌린 가슴의 매듭들이 하나둘씩 풀렸다.


나에게 얽힌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나밖에 없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바다로 떠났다. 바다와 교감하다 보면 좀 더 현명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답을 낼 수 있었다. 역시 바다는 삶의 혼탁을 씻어내고 마음공부가 되게 하는 벗이자 스승이다. 나는 사람도 자연과 닮아야 좋아했다. 살다 보면 많은 사람을 만나지만 그 정다움이 바다와 같이 특별한 사람들이 있었다. 물은 건너 봐야 알고 사람은 오랫동안 겪어 봐야 됨됨이를 알 수 있듯이, 사람도 산이나 물처럼 믿음직스럽고 변함이 없어야 어루만지게 되고 관심을 갖게 됐다. 그래서 나는 산과 바다로 떠나는 여행을 주저하지 않았다. 


드넓은 포도밭이 나타났다. 이곳을 섬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농촌 풍경 그대로였다.1) 포도밭은 따뜻한 피가 흐르는 인간처럼 푸근했다. 풍해를 꿋꿋하게 이겨 내는 모습은 신념이 강한 사람처럼 보였다. 포도나무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올 때는 미련 없이 떠나는 나그네의 즐거움을 맛보게 했다. 순진한 기쁨 속에서 여유를 마음껏 포식하고 휴식을 취하는 시간이었다.


선착장으로 향했다. 하늘은 정열적이었다. 사방으로 빗물을 쏟아낼 것처럼 습기를 분출하면서 어두워졌다가 푸른빛으로 변하기를 반복했다.

 

세찬 바람이 마을을 휘감으며 바다로 향했다. 수천 마리의 새가 일제히 날아오르는 소리처럼 격정적이었다. 그러나 바람도 한때였다. 이 시간이 지나고 나면 다시 순한 양이 됐다.

 

덧없음을 모르는 정열이나 격정은 미욱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세상을 조용히 관망하면서 불의에 맞설 줄 알아야 열정도 의미와 가치가 있다.

 

나는 가만히 서서 바다만 바라봤다. 개펄에서 허리를 구부린 채 조개를 캐는 아주머니가 보였다. 빨간 대야 안에 놓인 막걸리가 유독 눈에 띄었다. 아주머니는 내가 옆에 있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노동이 힘들 때는 민요 한가락과 막걸리 한 사발이 최고였다. 몸이 이완되고 피가 돌면서 피로를 싹 풀리게 했다. 여기에 구수한 파전과 쫀득한 도토리묵을 곁들이면 더욱 좋았다. 나도 모르게 침이 꿀꺽 넘어갔다. 어쩔 수 없이 없었다. 나는 슈퍼에 들려 막걸리 한 잔을 들이켰다. 여행은 늘 묘비처럼 무거웠다. 상념을 품고 떠난 여행은 내 마음의 상처를 꺼내 보는 일이었다. 그러나 내가 꿈꾸며 떠난 길에는 언제나 알 수 없는 약속의 빛이 연신 반짝이며 힘을 줬다. 동시에 고독과 향수에 젖은 삶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는 비밀도 깨닫게 했다. 


태풍 때문에 고립되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여행객은 모두 나가고 나밖에 없는 것 같았다. 매표소 직원은 오늘 나가면 뭍으로 갈 수 있지만 오늘 나가지 않으면 3일 후에나 배가 뜰 것이라고 걱정했다.


바다는 나를 반기는 건지, 떠미는 건지 아무 말이 없었다. 가라, 가지 말라 가타부타 대답 없이 출렁이기만 했다. 우리 둘은 한 동안 무거운 침묵으로 서로를 응시했다. 나는 바다가 뭔가를 자꾸 묻는 것 같아 눈을 감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나는 뭍으로 가는 배표를 끊었다.


연평도는 상반된 이미지가 공존했다. 굉장히 자유롭지만 뭔가 강한 기운에 지배돼 있는 시간, 유토피아 같지만 한국의 현실을 투영하는 터전, 사람들이 못 살 것처럼 위태롭지만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쓰임을 당하는 공간이었다. 한마디로 고요하지만 폭풍전야 같았다.


우리 사회도 연평도처럼 여러 의미가 겹겹이 교차돼 있었다. 나는 사회의 양면성을 긍정했다. 긍정의 밑바당에는 공존이 있었다. 기쁨과 아름다움을 긍정한다면 슬픔과 더러움도 긍정해야 했다. 그러한 긍정이 있어야만 세상을 바꾸는 힘도 나올 수 있었다. 기쁨과 아름다움만 찾고 슬픔과 더러움을 외면하면 우리 사회의 어두운 면을 보지 못했다. 이데올로기도 마찬가지였다. 좌우가 서로 긍정하고 목소리를 기울여야 더 나은 사회를 지향할 수 있었다.


누구나 ‘인권’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고 누구나 인권을 외치는 세상이 됐다. 세상이 살기 좋아진 것처럼 느껴지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여러 군데서 통곡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고, 많은 이들이 죽음으로 저항했다. 인권을 외치는 소리는 늘어났지만 아직도 현실은 척박하기만 하다.


1) 연평도 포도는 해풍을 맞고 천천히 자라서 출하시기가 늦다. 대신 당도가 높고 향이 뛰어나 가장 좋은 국산 포도 중 하나로 꼽힌다. 연평도 포도는 바닷바람에 씻기고 강렬한 땡볕에 타면서 자라기 때문에 껍질이 두껍고 건강해 저장 기간이 길고 신선도가 높다. 연평도 포도가 출하되는 시기는 보통 9월에서 10월까지다.



사람은 두 가지 본능이 부딪치며 균형을 맞춘다. 프로이트는 삶의 본능을 에로스(Eros)로 봤다. 반대로 죽음의 본능을 타나토스(Thanatos)라고 했다. 에로스는 생명을 유지하고 자신과 타인을 사랑하게 만든다. 반면 타나토스는 파괴한다. 자신을 파괴하고 타인과 환경을 처참하게 유린한다. 이 두 가지 본능이 서로 중화돼 인간의 삶은 이어진다. 나는 언제나 에로스의 과잉이었던 것 같다. 에로스라고 하면 성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렇지 않다. 마음에서 우러나는 사랑이 바로 에로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