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칼로 새긴 장준하

048. 죽음의 그림자 - 충격적인 증언, 독립운동가의 후예

이동권 2023. 9. 1. 01:23


개구리들이 울음주머니를 뽈룩대며 요란하게 울었다. 이름 모를 들꽃들은 보랏빛으로 번졌고, 저수지 방죽에 묶인 염소는 어슬렁대며 주둥이를 아물거렸다. 김유진 기자는 강동일 형사와 임일수를 번잡한 도심을 피해 교외로 불렀다. 세 사람은 나란히 풀밭에 앉아 먼 하늘을 응시했다.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다. 세 사람의 감정은 복잡하고 미묘했다. 별다른 인연도, 진심을 꺼내놓고 얘기해 본 적도 없었다. 불언을 깨뜨린 건 강 형사였다. 그는 임일수에게 왜 거짓 자수를 하면서 자신을 찾았는지 물었다. 임일수는 바로 이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두 사람을 엮어 장준하 선생 죽음의 비밀을 밝히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임일수는 독립운동가의 자손이었다. 그러나 한 번도 부친의 항일 행적을 밝히지 않았다. 부친은 남한 단독정부수립을 반대하다 죽임을 당했다. 이승만 정권은 그의 부친을 단정에 찬성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빨갱이 취급했고, 보도연맹이라는 조직에 강제 가입시켜 총살했다. 부친을 죽인 장본인은 이승만의 오른팔로 불렸던 김창령 육군 특수부대 지휘관이었다. 그는 지독한 친일파였고, 안두희에게 김구 주석의 암살을 지시한 장본이기도 했다. 보도연맹은 독재정권을 유지하고, 친일파를 보호하는 수단이 됐다. 이승만은 빨갱이 적출을 명분으로 부친뿐만 아니라 좌익과 무관한 사람들을 보도연맹으로 학살했으며, 자손들을 연좌제에 얽매어 갖가지 불이익한 조치를 취했다.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대통령도 보도연맹 유족들을 감옥에 집어넣고, 무덤까지 파헤치는 부관참시를 자행했다. 북한을 이롭게 한다는 죄목이었다. 


그 세월을 고통 속에서 보낸 임일수는 <사상계>에 기고를 하면서 알게 된 장준하 선생이 죽자 참지 못하고 펜을 들었다. 독립운동가마저 빨갱이라는 망령을 덧씌워 죽인 친일파 세력들을 단죄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글을 썼다. 


임일수는 장준하 선생을 죽인 사람들은 잔존 친일파들과 그의 후손으로 구성된 신일진회, 대통령의 사냥개였던 보안사라고 말했다. 이들이 암암리에 국민들에게 파고들어 친일 감정을 불어넣고, 일제 식민지 시절의 영광을 찾기 위해 갖가지 모략을 꾸미고 있다고 했다. 그들이 보툴리누스균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것도, 검경과 국립과학수사연구소를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것도 정재계를 동원해 막강한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정상일 중령은 죽기 전 임일수가 쓴 소설 「비밀조직」을 읽고 그를 찾아와 일곱 장짜리 서류를 건네고 자살했다. 서류는 친일세력들이 한국을 일본에 넘기기 위해 작성한 일곱 단계 계획, 일명 ‘7프로젝트’였다.


신일진회는 ‘2025년을 위하여’라는 목적으로 활동했다. 그들은 이승만 정권이 들어서면서 신일진회를 비밀리에 발족하고 활동에 들어갔다. 신식민지의 예정일은 2025년이었다.


7프로젝트는 일곱 차례에 걸친 단계별 한국 신식민지화 정책이었다. 1차는 친일 정권을 세워 한국 사회에 친일사관을 심고, 2차는 일본 문화를 전파해 반일 감정을 누그러뜨리고, 3차는 자위대의 집단 자위권을 확보하고, 4차는 독도를 일본의 영토에 편입시켜 위력을 과시하고, 5차는 미국과 함께 남중국해로 자위대를 파견해 중국을 압박하고, 6차는 한국 사회의 기득권을 장악해 한국을 일본의 현처럼 재편하고, 7차는 미국과 중국의 묵인 하에 통일된 한반도를 장악해 일본인들을 서서히 이주시키는 것이었다. 신일진회가 이런 계획을 세웠던 건 아직도 한국에 친일파들이 대거 잔존했기 때문이었다. 


1975년에는 1차 계획이 완료됐고 2차, 3차 계획이 실행 중이었다.


김유진 기자는 끝내 장준하 선생과 정상일 중령 그리고 두 사람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밝히지 못했다.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맞아 죽고 나서야 비로소 용기를 냈다. 김 기자는 비밀리에 인쇄소를 섭외해 임일수의 책 「칼로 새긴 장준하」를 찍었고, 한신일보에 책을 소개하는 서평 기사를 냈다. 그는 일제 식민지 시절 친일단체 일진회, 일본의 병탄정책에 앞장섰던 군인 그리고 그들의 후예들로 구성된 신일진회가 장준하 선생을 죽였으며, 이 사실을 아는 사람마저 죽여 죽음을 완전히 은폐한 사실을 기사에 적시했다. 그러나 저들에 의해 책이 발각돼 모두 수거됐고, 신문 기사도 삭제됐다. 


신일진회는 아직도 한국의 각계각층에서 활동하며 친일 정권을 세우고, 한국을 일본으로 편입시키기 위해 애쓰고 있다. 


김 기자는 주말이 되면 인적이 드문 시골에 가서 깊은 사색에 잠겼다. 앞만 응시하거나 하늘만 쳐다보며 사는 건 아닌지 자신을 되돌아봤다. 기자 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억압, 탄압, 폭력 같은 단어에 무뎌졌다. 현상을 부정하고 한 번 더 생각해 보는 지혜는 마모됐고, 권력이나 재물의 이해관계에 따라 벌어지는 갖가지 사건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서 경각심도 없어졌다. 


숙고의 시간을 가진 사람들은 삶은 달랐다. 어지러운 사회를 원망하며 주저앉지도, 정글 같은 인간사를 불평하며 한탄하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운명에 굴복하는 일은 절대로 없었다.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삶이 망가지고, 육체가 노추해져도 한때 절정이었던 아름다운 정신만은 간직하며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