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 이끈 희대의 정론지 - 함석헌 목사와 <사상계>
장준하는 복받쳐 오르는 슬픔을 참지 못했다. 수많은 죽음이 그를 덮쳤다. 존경하는 김구 주석을 잃은 데다 한국전쟁 당시 아버지는 인민군의 총격에 숨졌고, 아우는 실종됐다. 그 모든 원인은 민족의 분열과 척결하지 못한 친일파 때문이었다. 그는 죽음을 떨쳐내고 글로 시대적 과제와 해결방안을 제시하기 위해 1952년 정부 기관지 성격인 <사상> 발행에 참여했다. 그러나 <사상>은 정부의 지원에 의존한 만큼 순수하고 아카데믹한 교양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듬해 장준하는 혈혈단신으로 <사상>을 인수해 <사상계>를 창간했다. <사상계>는 창간호부터 전국 서점에서 불티나게 팔리며 큰 호응을 얻었다. 2호는 ‘부산정치파동’ 때문에 정치를 주요 의제로 꺼냈다. 부산정치파동은 임시 수도였던 부산에서 이승만이 독재정권의 기반을 굳히기 위해 강제로 개헌안을 통과시킨 사건이었다. <사상계>는 이승만 정권을 비판하는 글을 게재하면서 종전의 히트를 기록했고, 당대를 대표하는 지식인들이 연달아 기고하며 대학생들의 필독서로 자리 잡았다.
장준하는 <사상계>가 공전의 대성공을 거둘 무렵 삶에서 가장 귀중한 사람을 만났다. 바로 함석헌 목사였다. 함 목사는 <사상계>에 한국전쟁의 교훈을 되새겨보자는 의미에서 남한 사회의 극우 반공적 분위기에 일침을 가했고, 이승만을 미국의 꼭두각시로 칭하는 기고문을 게재했다. 이 글로 함석헌과 장준하는 고초를 겪었지만 <사상계>는 전국 서점에서 일시에 매진되는 진기록을 세웠다. 이후 함 목사는 <사상계>의 주필로 활동하며 장준하와 평생의 벗이 됐다.
<사상계>는 보안법파동이 일어나자 언론사 최초로 머리말을 백지로 냈다. 4.19혁명 때에는 독재정권을 비판하고 이승만의 하야를 요구하는 글을 실어 대중의 열렬한 지지를 얻었다. 보안법파동은 자유당이 정부를 비판하는 세력과 국민여론을 통제하기 위해 국가보안법 개정안을 발의하고 경위권을 발동해 여당 단독으로 통과시킨 사건이었다. <사상계>는 대한민국에서 명실상부한 최고의 언론기관으로 몫을 다했다. 민족자주, 평화통일, 민주주의, 경제발전, 문화창조 문제에 대해 끊임없이 이의를 제기하며 민중의 교양을 함양시켰다. 또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이슈뿐만 아니라 문예에도 큰 비중을 뒀다. 문인들은 <사상계>를 통해 저변을 넓힐 수 있었고, 역량 있는 신인들도 대거 문단에 진출했다.
친일의 대부 - 5.16쿠데타 그리고 탄압
장준하는 4.19혁명 이후 장면 정부의 국토건설부 본부장으로 발탁되면서 새 국가 건설을 위한 야심 찬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5.16군사쿠데타가 발발해 발을 뺐다. 그는 다시 <사상계>로 돌아와 쿠데타의 본질을 군부의 권력욕으로 정의하고 날 선 비판을 제기하다 부패언론인이라는 명목으로 ‘정치활동정화법’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그럼에도 정권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글은 멈추지 않았고, 정권은 <사상계> 죽이기에 나섰다. 3년 동안 혹독한 탄압을 자행해 장준하를 빚에 허덕이게 만들었다.
<사상계>는 1964년 한일회담 반대 시위가 거세가 일어날 때 선봉장 역할을 했다. 박정희가 전범 집단인 일본의 자민당과 굴욕적 매국협상을 벌인다며 국민을 투쟁의 장으로 견인했다. 박정희는 비상계엄을 발동했고, 장준하는 모처에서 은신했다. 계엄이 풀리기만을 기다리던 장준하는 ‘한일회담은 신 을사조약’이라는 글을 다시 발표하고 전국 순회강연을 다니며 설파했다. <사상계>는 또다시 정권의 탄압을 받아 문을 닫을 지경에 이르렀고, 장준하도 과로와 스트레스로 쓰러져 사경을 헤맸다.
1966년 삼성이 사카린 밀수 사건을 벌이다 발각됐다. 박정희와 이병철 회장이 공모해 벌인 엄청난 규모의 조직적인 밀수였다. 삼성은 한국비료 공장을 짓는 과정에서 사카린 2259 포대(약 55t)를 건설자재로 꾸며 들여왔다. 부산세관은 뒤늦게 이 사실을 적발해 1,059 포대를 압수하고 벌금 2천여만 원을 부과했다. 삼성은 정부의 지급보증 아래 상업차관 4천여만 달러까지 들여 일본 미쓰이사로부터 사카린을 수입했고, 박정희는 정치자금을 헌납받기 위해 삼성의 밀수를 허락했다.
장준하는 정권과 재벌의 정경유착을 심히 우려하며 거리로 나갔다. 그는 민중당이 주최한 규탄대회에 참여해 청와대와 재벌총수들이 벌인 범법행위를 낱낱이 폭로하면서 박정희를 밀수의 왕초라고 쏘아붙였다. 그는 이 일로 경찰에 연행됐지만 적용할 법이 없어서 금방 풀려났다.
장준하는 야당 대통령선거 후보 단일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정치인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윤보선 후보의 지원 유세에 다닐 때 더욱 과감하게 박정희를 공격했다. 어느 누구도 정면에서 하지 못했던 얘기였다. ‘일본 천황에 충성을 맹세하고, 일본군대 장교로 광복군에 총부리를 겨눈 사람이라’면서 그가 대통령이 되는 것은 민족의 수치라고 맹폭격을 가했다.
한국군 장악한 가짜 독립운동 세력들 - 민주주의, 돌베개
1967년 6월 8일 국회의원 부정선거가 정국을 강타했다. 박정희는 행정시찰을 명목으로 민주공화당 지방유세전을 전개했고, 국가기관부터 일선 공무원까지 총동원해 여당의 선거운동을 펼쳤다. 신민당은 대통령과 공무원의 불법 선거운동을 고발했지만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인정하지 않았다.
투표 당일 선거 부정은 더했다. 공개투표, 대리투표, 환표(표 바꿔치기), 무더기투표 같은 광범위한 부정이 저질러졌다. 개표결과는 뻔했다. 공화당은 의석수의 3분의 2 이상인 총 129석을, 야당은 45석을 얻었다. 박정희가 부정선거를 계획적으로 벌인 이유는 3선 개헌 때문이었다. 개헌 가능 의석은 117석이었다. 신민당을 비롯한 야권은 6.8선거를 부정선거로 규정하고 투쟁에 돌입했다. 선거무효 소송을 제기하고 부정선거관계 공무원들을 고발했지만 씨도 먹히지 않았다.
장준하는 선거법위반으로 구속 상태에서 동대문을에 출마해 당선됐다. 그는 국회의원이 되면서 <사상계>에서 손을 떼고 동인 중 한 명인 부완혁에게 <사상계> 발행을 맡겼다. 장준하는 재야세력과 함께 ‘3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를 조직하고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박정희는 3선개헌안을 통과시키면서 민주주의를 깔아뭉개고 영구집권의 발판을 마련했다.
장준하는 대학생들과 민족학교를 세우고 노동자, 농민, 서민 등 기층이 함께 움직이는 새로운 민중운동을 전개했다. 또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해 젊은 문인들이 주도하는 민주화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그는 무소속으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낙선한 뒤 대통령 선거 출마를 제의받았다. 재야 세력들이 장준하를 박정희의 저격수이자 천적이라며 대선 출마를 권유했다. 그는 출마를 한사코 사양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박정희는 속이 타 들어갔다. 지식인들에게 인정을 받고, 자신에게 사사건건 ‘딴지’를 걸고, 자신과는 너무나 다른 길을 걸어온 그가 눈엣가시였다.
장준하는 잠시 정계를 떠나 「돌베개」를 집필했다. 그가 이 책을 쓴 이유는 친일파들이 한국사회를 주무르는 현실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특히 일본군에 입대해 침략전쟁의 일원으로 일본 천황에 충성하다 해방 후 탈을 바꿔 쓰고 가짜 독립운동가 행세를 했던 일당을 고발하기 위해서였다. 독재망령에 빠진 박정희를 비롯해 한국군의 주요 요직을 독차지한 군장성들과 경찰 간부들이었다.
민족통일운동에 앞장선 장준하 - 7.4남북공동성명, 통일운동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됐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김영주 노동당조직지도부장이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발표한 통일 관련 성명이었다. 남북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지 말고 자주적으로 해결하며,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하며,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해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자.’면서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3대 원칙을 공식적으로 천명했다.
국민들은 열렬히 환호했다. 장준하도 성명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새로운 운동의 길로 나섰다. 민주화운동에서 민족통일운동으로 폭을 넓혔고, 뛰어난 통찰력으로 통일운동의 앞날을 제시했다. 그는 통일의 주체로 민중을 내세웠다. 남한 사회에서 기득권을 누리는 계층이 아니라 빈곤과 억압에 신음하는 절대다수의 민중이 통일을 바라며, 이들이 걱정 없이 사는 세상, 이들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위해 분단현실을 꼭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준하는 <사상계> 폐간 이후 함석헌 목사가 발간한 <씨알의소리> 1972년 9월호 ‘민족주의자의 길’이라는 기고문에서 이렇게 밝혔다.
모든 통일은 좋은가? 그렇다. 통일 이상의 지상명령은 없다. 통일은 갈라진 민족이 하나가 되는 것이며, 그것이 민족사의 전진이라면 당연히 모든 가치 있는 것들은 그 속에 실현될 것이다. 공산주의는 물론 민주주의, 평등, 자유, 번영, 복지 이 모든 것들에 이르기까지 통일과 대립되는 개념인 동안은 진정한 실체를 획득할 수 없다. 모든 진리, 모든 도덕, 모든 선이 통일과 대립하는 것일 때는 그것은 거짓 명분이지 진실이 아니다. 적어도 우리의 통일은 이런 것이며, 그렇지 않고는 종국적으로 실현되지도 않을 것이다.
7.4남북공동성명은 외세 의존적이고 대결지향적인 통일노선에서 벗어나 올바른 통일원칙을 도출한 점에서 의의가 있었다. 그러나 박정희는 자신의 권력기반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7.4남북공동성명을 이용하고 그해 10월 유신을 선포해 그 의미는 빛바랬다. 특히 박정희의 최대 정적이었던 야당지도자 김대중 납치사건을 벌여 남북조절위원회마저 중단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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