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칼로 새긴 장준하

047. 장준하 일대기 34 - 장준하, 의문사하다

이동권 2023. 9. 1. 01:17

대통령 긴급조치 1호 - 민주화운동 그리고 투옥

1972년 박정희는 유신헌법을 통과시키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한국 사회의 모든 민주주의를 정지시켰다.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미명하에 장기집권을 위한 틀을 구축하려고 했다. 유신헌법이 제정되면서 대통령 선거는 간접선거제로 바뀌었고, 의회의 권한은 제한됐다. 정치활동도 금지됐으며 언로도 막혔다. 


박정희와 장준하의 정면승부가 시작됐다. 장준하는 박정희의 유신에 맞서 함석헌, 계훈제, 백기완 등 재야 민주세력과 연합해 대항했다. 개헌청원운동본부를 발족하고 전 국민을 대상으로 유신헌법개헌청원100만인서명운동을 벌였다. 100만인서명이 열흘 만에 30만 명을 넘어서자 놀란 박정희는 담화문을 발표하고 개헌서명운동 즉각 중지를 요구했다. 박정희의 강압적인 행태는 문인 61명의 개헌청원지지성명을 불렀고, 개헌운동은 나날이 확산됐다. 박정희는 ‘대통령 긴급조치 1호’를 발표하고 공포분위기를 조성해 입막음을 시도했다. 장준하는 긴급조치 1호 위반혐의로 구속돼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장준하의 징역은 1년 뒤 지병으로 중지됐다. 그는 고질적인 심장과 간질환으로 고통이 심했다. 


장준하가 옥에 갇히고 2개월 뒤 전국 대학가에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명의의 유인물이 뿌려지며 유신철폐시위가 본격화됐다. 박정희는 ‘공산주의자의 배후조종을 받은 민청학련이 점조직을 이루고 암호를 사용하면서 2백여 회에 걸친 모의 끝에 화염병과 각목으로 시민폭동을 유발했으며 정부를 전복하고 노농정권을 수립하려는 국가변론을 기도했다.’는 민청학련사건 특별담화를 발표하고 긴급조치 4호를 선포했다. 이 사건으로 인혁당 재건 관련자 23명을 비롯해 윤보선 전 대통령, 지학순 주교, 박형규 목사, 김지하 시인 등 253명이 구속됐다. 그중 14명은 사형이 선고됐고, 16명은 무기징역, 나머지 사람들은 최고 20년에서 최하 5년의 중형이 선고됐다.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는 집회와 시위가 전국에서 일어났고, 반독재민주화투쟁이 격화됐다. 미국도 군사, 경제원조의 대폭 삭감을 논의하면서 국제여론도 악화됐다. 박정희는 사건발생 10개월 만에 인혁당 사건 관련자와 반공법 위반자 일부를 제외한 전원을 석방했다. 그러나 인혁당 사건도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공작이었다. 특히 형이 확정된 지 18시간 만에 인혁당 재건 관련자들을 사형시켜 국제사회로부터 ‘사법살인’이라는 지탄을 받았다.

자주, 민주, 통일의 선각자 - 장준하의 그 길

장준하는 유신체제와 최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재야 세력은 물론 김대중, 김영삼 등 야권 지도자들과 회합하며 통합을 추진했다. 신변의 불상사를 예상할 수밖에 없는 지독한 투쟁의 연속이었다. 불길한 예감은 현실이 됐다. 1975년 8월 17일 장준하는 경기도 포천군 약사봉 계곡 암벽 아래에서 사체로 발견됐다. 


장준하는 일본군을 탈출해 6천 리 경장행군을 하면서 선대의 잘못으로 후대가 나라 잃은 아픔을 겪는 것을 통한했다. 자신은 꼭 훌륭한 선대가 돼 후대에 평화롭고 아름다운 조국을 물려주겠노라고 굳게 다짐했다. 그는 약사봉에 오르면서 똑같이 다짐했다. 못난 선배가 되지 않기 위해 앞날을 후회 없이 살겠노라고 두 다리에 힘을 주며 산을 올랐다. 


사람은 자신의 신념에 따라 살았다. 하지만 누구나 신념대로 살지 못했다. 용기와 의지가 뒤따르지 않았다. 머릿속에만 가득 찬 신념은 헛말과 상처만 불렀다. 신념은 어떤 고난과 역경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행동으로 실천할 때 비로소 가치가 있었다. 일제 식민지 시대를 살았던 독립운동가들의 삶이 그러했고, 장준하의 삶이 그러했다. 사념을 버리고 오직 조선 독립과 민족의 번영을 위해 죽고 살았다. 정의와 진실, 양심은 반드시 이기며, 간절한 희망은 언젠가 꼭 이뤄진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피와 땀으로 조선의 독립은 앞당겨졌다. 그러나 해방 후 친일파 청산이 제대로 되지 않은 데다 분열과 대립이 거듭되면서 터무니없는 부조리와 온갖 악덕이 활개 쳤다. 민중의 안위에 관심 없었던 정부는 사실상 식민지 지배정책을 답습했다. 특히 박정희 정권의 10월 유신은 식민지 지배구조의 재현이었고,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총체였다. 더욱 가슴 아픈 사실은 해방 후 친일파 후손들은 떵떵거리며 살았지만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은 매우 고단한 삶을 영위한 것이었다.


장준하는 해방 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민족주의자이자 민주화운동의 최전선에 섰던 인물이었다. 일본군에서 탈출해 임시정부로 가는 과정, <사상계>를 발간하고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그가 얼마나 열정적이고 치열했으며, 얼마나 순수하고 고결했으며, 얼마나 정의롭고 단단했는지 여실히 보여줬다. 특히 박정희에게 맞섰던 과정과 7.4남북공동성명 이후 민족 지상 최대의 과제로 통일운동을 꼽은 점은 자주, 민주, 통일의 선지자라는 칭호를 받을 만했다. 

장준하 의문사의 진실을 묻다 - 의문사

장준하 선생은 1975년 8월 17일 약사봉 계곡 암벽 아래로 떨어졌다. 산악회원들이 점심을 준비할 사이 잠깐 주위를 둘러보겠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던 그가 얼마 되지 않아 싸늘한 주검이 됐다. 산악회 일행 중 김용환이 장준하 선생과 동행했다. 김용환은 장준하 선생이 계곡 아래로 추락한 사실을 회원들에게 알린 뒤 12시간 동안 잠적했다.

 

시신을 검안했던 의사는 머리를 바위에 부딪쳐 두개골이 함몰됐다는 소견을 내놨다. 하지만 장 선생의 시신을 사고 현장에서 운구했던 백기완 선생의 생각은 달랐다. 절벽에서 떨어진 시신이 너무 멀쩡한 점, 후두부에 등산용 피켈로 찍힌 것 같은 함몰상이 있는 점, 검안 때 시신 두 군데에 주사 자국이 발견된 점을 예로 들며 실족사의 의문을 제기했다. 그의 주검을 목격했던 다른 사람들도 암살을 눈치챘다. 그러나 아무도 얘기를 꺼내지 못했다. 시국이 긴박하고 살벌했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그대로 끌려가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럼에도 당시 <동아일보> 성락오 기자는 장준하 선생의 타살 의혹을 제기했다. 하지만 긴급조치법 위반으로 잡혀가고 말았다. ‘야당 지도자의 괴사’라는 기사를 쓴 <파이스턴이코노믹리뷰> 로이황 기자도 똑같은 이유로 해외 추방되면서 의문사 논란은 일단락됐다.


2012년 장준하 선생의 유골이 이장됐다. 두개골에는 당시 검안했던 의사의 소견과 일치한 상처가 있었다. 그러나 추락사한 유골이라고 보기엔 골절이 한정돼 있었다. 두개골과 엉덩이뼈에만 골절이 있었다. 추락사할 경우 머리를 지탱하는 목뼈, 어깨뼈, 척추, 갈비뼈 골절이 동시에 발생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함몰된 두개골의 모양도 특별했다. 테두리가 선명한 원형이었다. 둔기로 심하게 얻어맞아 구멍이 생긴 게 아니라면, 이미 죽은 뒤 계곡 아래로 던져진 게 아니라면, 나타날 수 없는 모양이었다.


장준사 실족사의 목격자 김용환의 진술은 계속 달라졌다. 1975년 당시에는 장준하 선생이 소나무를 붙잡고 내려오다 추락했다고 말했다. 1988년 재조사 때에는 소나무를 잡았는지, 잡지 않았는지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고 2004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에서는 소나무를 본 적도 없고, 소나무 얘기를 지금껏 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게다가 사건 이후 그의 행적에 대한 진술도 조사 결과 모두 새빨간 거짓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그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고, 의문사의 진실은 수수께끼로 남았다. 


장준하 선생은 실족사였을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를 죽인 사람은 혹은 비밀조직은 과연 누구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