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칼로 새긴 장준하

024. 장준하 일대기 11 - <등불>을 발간하다

이동권 2023. 8. 11. 22:39

막사에 울려 퍼진 혁명가 - 동지들…장하오

중앙군관학교의 전신은 중국국민당 육군군관학교였다. 1924년 제1차 국공합작의 산물로, 초대 교장은 장제스가 역임했다. 장제스는 이곳에서 군사훈련뿐만 아니라 사상교육에도 전력을 쏟았다. 군관학교에 들어온 학생들은 소규모 군대를 이끄는 자격을 주었고, 명예나 급여 면에서 최고의 대우를 해주었지만 그만큼 엄격한 기강과 규율을 강조했다. 특히 혁명에 있어서는 타협을 불허했다. 


육군군관학교는 조선인을 피압박민족으로 후원하고, 입학을 독려했다. 김구 주석이 1933년 중국 국민당 군사위원장 장제스를 만나 중앙군관학교에 한인특별반 설치를 요청한 뒤였다. 의열단 간부였던 김원봉을 비롯해 많은 한국인 청년들이 이곳에서 공부한 뒤 졸업 후 독립운동을 위한 군사적 기초를 닦았다. 육군군관학교는 1938년 일본군에게 폭격을 당했다.


중앙군관학교 임천분교에도 한국광복군간부훈련반이 부설됐다. 국민당은 한국인 학도병의 탈출이 늘어나고, 일본과 전쟁이 격화되면서 한국군을 위한 별도 훈련반을 조직했다. 한국과 힘을 합쳐 일본을 몰아내자는 의도였다. 


한국광복군간부훈련반은 일본군에서 목숨을 걸고 탈출한 학도병들이 주축이었다. 장준하는 그곳에서 일본군 쓰카다 부대에서 마주쳤던 낯익은 동료들을 만나 회포를 풀었다. 서로 얘기를 나눈 적은 없었지만 첫눈에 알아봤다. 그리워하다가 만난 것이 아니었는데도 마음속에 쌓인 게 무엇이 그리 많은지 손을 부여잡고 껴안기 바빴다. 조국 독립을 위해 일본군에서 목숨을 걸고 탈출했다는 동질감이 만들어 낸 일종의 동지애였다. 서로의 가슴을 찌르르하게 만드는 동포애이기도 했고, 지난날의 고통과 앞으로 펼쳐질 고난에 대한 격려이기도 했다.


장준하 일행은 한국광복군훈련반이 마련한 환영식에 참석했다. 환영식은 동지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기 위해 약간의 술과 노래, 춤이 어우러졌다. 노래는 혁명가를 비롯해 팔도 민요가 모두 나왔다. 동지들은 빠른 노래가 나올 때는 자리에서 일어나 팔을 양옆으로 펼쳐 들어 춤을 쳤고, 느린 노래가 나올 때는 구성진 목소리로 따라 부르며 민족의 아픔과 설움을 토했다. 혁명가는 모두가 따라 부르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조국 독립과 민족 해방을 위해 싸우자는 목소리가 하나로 어우러져 막사를 쩌렁쩌렁 울렸다. 

하얗게 새운 밤 - 답보상태와 반복

장준하 일행은 다음날 아침 가장 먼저 일어났다. 환영식이 밤늦게까지 이어졌지만 피곤하지 않았다. 퉁퉁 부은 발가락과 뭉친 다리 근육, 뻣뻣한 목덜미는 중앙군관학교의 정식 교육에 참여하는 설렘 때문인지 일상에 별다른 지장을 주지 않았다.


일행은 수건을 챙겨 들고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대충 쓸어 넘기면서 세면장으로 향했다. 모두들 일어나기 전이라 세면장은 한가로웠다. 물을 담은 대야에 얼굴이 비쳤다. 일행의 표정은 모두 밝았다. 바짝 말라 뺨은 우묵하게 파였지만 입술은 생동감이 넘쳤고, 눈빛은 이글이글 타올랐다.


세면을 끝내고 숙소로 들어왔지만 아직도 많은 이들이 쉽게 깨어나지 않았다. 얼굴에는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고, 매가리가 없어 보이기까지 했다. 장준하는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루 종일 뛰어다니며 훈련받느라 힘들었을 텐데 환영식을 해준다고 쉬지 못했을 동지들이 걱정됐다. 장준하는 만성 피로에 젖어 보이는 동지들의 모습이 전혀 다른 이유 때문이라는 것을 사흘이 지나서야 알았다. 


장준하 일행은 중국군에서 준비한 군복을 갈아입고 다부진 각오로 교육에 참여했다. 장준하는 타격과 총검술을 비롯한 각종 군사훈련과 새로운 지식을 함양할 수 있는 수준의 강의를 기대했다. 그러나 훈련은 지루했고, 강의는 무료했다. 군사훈련은 기본자세나 동작을 되풀이하는 도식적인 교련이었고, 강의는 학도병이라면 다 아는 상식 수준의 내용이었다. 


며칠이 지나도 구태의연하고 획일적인 교육은 달라지지 않았다. 몸과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교육 일색이었다. 장준하 일행은 교육이 답답하고 지루하게 진행되자 시간낭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중국 군인들은 소총사격, 수류탄 투척, 박격포 사격 같은 훈련을 수시로 했지만 한국인에게는 총 한 자루조차 주어지지 않아 마음속에 공허함마저 밀려왔다. 이러다간 조국 독립에 대한 꿈도 무너지지는 게 아닌지 걱정이 들었다. 내실 없는 광복군, 형식적인 독립운동은 언젠가 밑을 드러낼 공산이 컸다.


일본군 부대에서 탈출했을 때 희구했던 것과 현실은 달랐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더욱 크게 다가왔다. 일행은 대책을 강구해야 했다. 반복되는 교육과 별도로 의미 있는 시간을 만들 묘책이 필요했다. 장준하는 뾰족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아 하룻밤을 하얗게 새웠다.

배움의 즐거움 - 강좌를 시작하다

장준하는 고심 끝에 강좌를 열자고 제안했다. 학도병마다 학교 다닐 때 관심 분야나 공부했던 내용이 달랐던 점을 착안해 자신의 지식을 공유하자는 의견을 냈다. 여기저기에서 찬성 의견이 쏟아졌다.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을 공론공담처럼 헛되이 쓰거나 남에게 자랑하려는 요식행위가 아니라 무료한 훈련병 생활을 의미 있게 채워보자는 발의였기 때문이었다. 혼자만 알고 있는 지식은 전문적이지만 단편적이었다. 세상에는 여러 분야의 지식이 있었고 그 내용 또한 무궁무진했다. 또 지식은 공유하지 않으면 죽은 것과 다르지 않았다. 널리 널리 퍼져나가야 살아 있는 생명력을 가졌다. 게꽁지만 한 지식이라도, 평범한 경험이라도, 누군가에게는 빈말공부가 아니라 유용한 배움이 될 수 있었다. 


첫날 강의는 장준하와 김준엽이 맡았다. 두 사람은 자신이 가장 잘 알고 누구나 재밌게 들을 수 있는 내용을 주제로 잡아 동지들의 관심을 끌어 모은 뒤 갖가지 예를 들어가며 열변을 토했다. 팔짓을 해가며 눈동자를 굴렸다. 목소리의 강약을 조절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강의는 자기 잘난 맛에 해봐야 역효과만 낼 뿐이었다. 머리에 들어가지 않은 어려운 주제를 잡아봐야 그 또한 시간낭비였다.


강의는 혀끝에 불이 붙은 것처럼 거침이 없었고, 단박에 좌중을 휘어잡았다. 80여 명에 달하는 동지들을 일심동체로 만들었다. 동지들은 열성적인 강의에 크게 호응했다. 메모를 해가며 경청하는 동지도 있었고, 강의 내용을 곱씹어 보며 질문거리를 챙기는 동지도 있었다. 강의가 끝나면 우렁찬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밀도 높은 내용을 쉽게 설명해서 그런지 동지들의 표정은 모든 내용을 완벽하게 이해한다는 눈치였다. 


강의가 거듭될수록 동지들의 눈빛은 변하기 시작했다. 분야도 다양해지고 내용도 깊어지면서 점점 더 배움의 즐거움을 갈구했다. 배움의 즐거움은 학문에 뜻을 두고 탐구하려는 욕구는 아니었다. 인간을 배우고, 삶의 가치를 배우고, 자유의 소중함을 배우자는 것이 목적이었고, 올바른 의식을 함양해 조국 독립의 길을 좌절하지 않고 나가자는 의지였다. 그럼에도 별의별 이유를 들어가며 강의를 거부하던 몇몇이 있었다. 괜히 어깃장을 놓으면서 자기 생각만 옳다고 자기주장을 해대는 부류였다. 그러나 얼마지 않아 이들마저도 강의를 들으러 왔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지루하고 무료한 훈련을 견디는 방법은 강의밖에 없었다. 

짊어진 숙명 - <등불>

강의가 열띤 분위기에서 진행되면서 전성기를 구가했다. 모두들 군관학교에서 마련한 교련이나 강의보다 동지들이 어울려 준비하는 강의를 좋아했다. 따분하지도, 고압적이지도 않았고 열린 마음으로 논쟁할 수 있어서 더욱 부응했다. 강의에 대한 각별한 관심은 책으로 이어졌다. 강좌가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고 나중에도 두고두고 읽어 볼 수 있는 교재로 만들어지길 바라는 동지들이 나타났다. 장준하는 강의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책으로 만들면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복습이 가능하고, 강의를 듣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큰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인쇄였다. 손으로 일일이 써서 책을 만드는 일은 높은 노동 강도를 요구했고, 효율적이지도 않았다. 


장준하는 등사기를 사방팔방으로 수소문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대도시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것을 조그마한 도시에서, 그것도 전쟁 통에 찾는다고 핀잔만 잔뜩 들었다. 붓과 종이마저 구하기 힘든 시절이었다. 하루 세끼 먹는 것도 힘들었고, 세끼를 먹는다고 해도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사정이 안 됐다. 전쟁은 모든 것을 황폐화시켰다. 


장준하는 포기하지 않았다. 편집팀을 꾸리고 손으로 써서 책을 내기로 결정했다. 삽화는 김준엽의 그림 솜씨를 빌렸다. 종이가 부족하면 군관학교 관계자들에게 부탁해 얻었다. 형식은 잡지처럼 구성했고, 내용은 참신함을 담보했다. 읽는 재미를 위해 수필이나 시도 추가했다. 표지는 투툼한 종이를 구할 수 없어 천을 잘라 종이에 붙여 사용했다. 천은 김준엽이 내의를 잘라 준비했다. 잡지 이름은 <등불>로 정했다. 어둠이 내린 곳을 환하게 밝혀 주는 등불은 자신들이 하고 있는 모든 일을 함의했다. 동지의 등불이 되고, 겨레의 등불이 되는 삶을 살아가려는 한국광복군간부훈련반 80여 명의 의지가 오롯이 담긴 이름이었다. 


<등불>이 발간되자 서로 먼저 보겠다고 난리가 났다. 장준하를 비롯해 편집팀은 여간 흐뭇한 게 아니었다. 서로의 아이디어와 재주, 고민과 노력 끝에 탄생한 잡지에 동지들의 지대한 관심이 모아지자 힘이 솟았다. 장준하는 곧바로 2호를 준비했다. <등불>이 교재로서 제 구실을 하려면 멈추지 않고 발간돼야 했다. 장준하는 <등불>을 내면서 잃었던 자신감도 되찾았고, 자신의 잠재력도 확인했다. 또 자신이 조국 독립 후 새로운 대한민국을 건설하는데 무엇으로 이바지해야 하는지 숙명적으로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