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칼로 새긴 장준하

014. 장준하 일대기 01 - 강제 징병으로 일본군에 끌려가다

이동권 2023. 8. 7. 17:01

 

식민지 조국에 태어나 - 세상에 맞서다

 

장준하는 1918년 8월 27일 평안북도 의주에서 장석인 목사의 4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 독학했다. 아버지는 총명하고 언행이 바른 그를 공부시키지 못해 두고두고 후회하다 뒤늦게 대관보통학교에 5학년으로 입학시켰다. 또래보다 영특한 장준하를 보고 교장이 특별히 배려했다. 


그는 어린 나이에도 신앙인으로서 자기 자신에게 부끄럼이 없기를 바랐다. 옷차림은 가년스럽고, 먹을거리는 변변치 않고, 한 방에서 부모형제와 함께 잠을 잘 정도로 생활은 궁색했지만 얼굴엔 구김새가 없었다. 늘 가난한 이웃을 돕길 원했고, 아래 동생들에게 존중하는 마음을 가졌다. 


의주 주민들은 오랑캐보다 왜구에 더욱 적대적이었다. 임진왜란을 겪은 뒤부터였다. 선조는 임진왜란 때 훗일을 도모하기 위해 의주로 파천했다. 그러나 일본군이 파죽지세로 몰려온다는 소문이 나돌자 곧바로 백성들을 버리고 압록강을 건넜다. 주민들은 임금이 떠나자 나라를 불신했고, 일본을 증오했다. 이들이 개화기 때 중국에서 유입되는 서양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종래의 봉건사회 질서를 타파하는데 능동적으로 동조한 이유도 다르지 않았다.

 

주민들은 일제 식민지 시절 지식인 중심으로 기독교를 속속 받아들였다. 교인들은 개화기에 발아한 민족주의 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았고, 대부분 일제 36년간 조국 독립의 여명을 여는 우국지사로 활동했다. 장준하도 선각자였던 아버지의 뜻에 따라 독실한 기독교 집안의 가풍을 배우고 익혔다. 식사 전에는 주기도문을 외웠고, 주일에는 교회에 나가 설교를 들었으며, 가슴 한편에는 일본에 대한 의분을 품었다.


장준하는 1932년 평양 숭실중학교 입학 후 이듬해 아버지를 따라 신성중학교로 전학했다. 그는 중학교 시절 일본식 교육에 반대하는 동맹휴학에 나섰고, 방학 때에는 어려운 농촌현실을 파악하기 위해 현장을 누볐다. 졸업할 무렵에는 루쉰(중국사상가)의 사회주의 평론을 보다 들켜 어린 나이에 뜨거운 세상맛을 보기도 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일본에 유학하려는 포부가 있었지만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그 꿈을 잠시 미뤘다. 자신의 욕심 때문에 집안에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는 성인이 된 뒤 일본 유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교사로 근무했다. 학교에서 달마다 지급되는 삯은 쥐꼬리만 했다. 그는 3여 년 동안 틈틈이 모은 돈과 버들고리짝 같은 가방 하나를 메고 일본행 배에 몸을 실었다.

 

짓밟힌 조선의 종교와 사상 - 신사참배 거부

장준하는 1941년 동양대학 예과(철학과)에 입학했다. 그가 철학을 전공한 이유는 삶의 진정한 가치를 찾고 싶어서였다. 철학은 부조리한 인간과 세상의 본질을 인식하는 문제였다. 관념적으로 추론하는 학문이 아니라 직접 체화하는 학문이었고, 주체적이고 엄격한 태도를 요구하는 측면에서 그에게 잘 맞았다. 그러나 그는 식민지 조국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지식인으로서 고뇌가 많았다. 어떻게 하면 한국 민중에 힘이 되고, 궁극적인 위로를 전해줄 수 있을지 고민하다 일본신학교로 적을 옮겼다. 


장준하가 철학 공부를 포기하고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아버지의 간곡한 권유가 한몫했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인 데다 일제의 악랄한 탄압에서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살기엔 성직자가 나았다. 장준하의 생각은 더 앞섰다. 민중의 삶을 어떻게 하면 개선할 수 있을지 고민이 많았다. 그가 1970년대 학생들과 민족학교를 세워 노동자, 농민, 서민에게 의식화 교육을 시킨 이유도 그러했다. 독재와 분단이 만들어 낸 압제에 신음하던 민중을 해방시키기 위해서였다. 


장준하의 아버지 장석인은 1938년 일본 신사 참배를 거부하다 근무하던 신성중학교에서 해직돼 길거리에 나앉았다. 평생을 깨끗하고 올곧게 살았던 그에게 어쩌면 예고된 일이었다. 살길이 막막해진 그를 보듬어 준 건 친분이 있던 대관교회 목사였다. 그는 장석인을 자신의 교회 목회자로 위촉해 가정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러나 장석인에게는 미행이 늘 뒤따랐다. 일본 경찰은 신사참배를 거부한 그에게 ‘요시찰인물’이라는 딱지를 붙여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장석인은 경찰에게 꼬투리를 잡히지 않기 위해 각별히 언행에 신경 썼다. 경찰들은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는 것처럼 보이거나 예배할 때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설교를 하면 갖가지 트집을 잡아끌고 갔고, 악랄한 고문을 가해 불구로 만들었다.


일본은 조선 민족의 종교와 사상을 송두리째 없애려고 했다. 군국주의와 조선의 식민 지배를 위해 신사 참배를 강요하면서 천황 이데올로기를 주입시켰다. 조선총독부는 해방 전까지 1천여 개가 넘는 신사를 세웠고, 학교에는 ‘호안덴(천황의 사진이나 칙어를 봉안한 전각)’, 가정에는 ‘가미다나(신을 모시는 감실)’라는 신단을 만들어 참배하도록 했다. 신궁도 2곳을 건립해 조선 민중을 참배에 동원했다. 1942년 한 해 신궁 참배에 동원된 수는 270만여 명에 이른다.

버림받은 위안부 -  김희숙과 결혼

장준하는 아버지의 신사참배 거부로 집안에 불행이 닥칠 것을 감지하고 1943년 11월 급하게 귀국했다. 장남으로서 본분을 다하기 위해 남은 학업을 포기하고 귀국선에 몸을 실었다. 연인 김희숙과의 결혼을 매듭지으려는 의도도 있었다. 장준하는 신안소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할 때 제자였던 김희숙의 집에서 하숙했다. 이것이 인연이 돼 두 사람은 급격히 가까워졌고, 일본 유학 이후에도 계속 연락하며 지냈다. 


일제는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을 일으킨 1930년대부터 일본 군인들의 성노예로 조선 처녀들을 강제로 징발했다. 위안부는 조선인뿐만 아니라 중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의 여성들도 있었으며, 그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일제는 전선이 확대되고 전쟁이 장기화되자 군인들의 사기 진작과 성병 예방을 명분 삼아 1932년 군위안소를 만들었고, 1937년 제도화시켰다. 위안부로 끌려간 여성들은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며 군인들의 성노리개가 됐다. 변변한 위생시설조차 없는 곳에서 하루 10명에서 30명에 이르는 군인들을 상대하다 성병에 걸려 목숨을 잃었다. 군인들에게 삿쿠(콘돔)를 사용토록 했지만 이를 지키지 않은 군인들이 많았다. 


장준하는 일본이 한국 처녀를 위안부로 강제로 차출하자 김희숙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었다. 김희숙을 지키는 길은 그녀를 유부녀로 만드는 게 최선책이었다. 장준하는 이듬해 1월 5일, 귀국한 지 한 달여 만에 김희숙과 서둘러 결혼했다. 그러나 그는 결혼한 지 2주 만에 강제 징용으로 일본군에 징병됐다.


일본이 패망하고 조선이 독립하자 위안부들은 양쪽 나라에서 버림받았다. 일본 군인들은 전세에 밀려 퇴각할 때 위안부를 한데 모아놓고 학살했다. 또 피난명령을 내리지 않고 전투기 폭격을 가해 수많은 위안부를 몰살했다. 겨우 목숨을 건진 위안부들은 연합군 포로수용소에 있다 조선에 돌아왔다. 그러나 위안부 대부분은 가족 곁으로 돌아가지 않고 일본에 잔류했다. 위안부라는 손가락질을 견딜 자신이 없었다. 한국에 돌아온 여성들의 삶은 비참했다. 가족과 이웃을 등지고 피해 살았으며,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며 막노동판을 전전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위안부도 많았다. 


일본은 아직까지도 위안부에 대한 진정한 사과나 반성이 없으며, 이들에 대한 명예회복과 배상도 하지 않고 있다.

학도병으로 나서며 - 1944년 1월 19일 정주역

장준하는 학도병으로 전장에 나가야 할 처지에 몰렸다. 그는 결단했다. 집안의 불행을 자신이 대신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징병에 응했다. 장준하의 입대 소식이 알려지자 지방관청과 유지들이 입영을 축하는 편지와 입영 행사 때 사용할 어깨띠를 보내왔다. 그는 그것들을 갈기갈기 찢어 불태웠다. 일본이 일으킨 침략전쟁에 동원되는 청년들에게 해서는 안될 짓거리였다.


일본은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조선인들을 총알받이로 쓰기 위해 ‘육군특별지원병령’을 실시하고 대규모 징집에 나섰다. 1941년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뒤에는 ‘학도지원병제’를 시행해 강제로 20만여 명에 달하는 학생들을 전쟁터로 내몰았다. 뿐만 아니라 15만여 명의 조선인들을 강제로 징용해 군사시설 공사 현장에 보냈으며, 일본에 유학 중인 조선인 학생에게도 강제 징병을 적용했다. 


장준하는 1944년 1월 19일 일본신학교 교복을 입고 성경을 품에 안은 채 홀로 정주역 플랫폼에서 평양발 기차를 기다렸다. 어느 누구도 장준하가 학도병으로 입대하는 줄 모를 차림새였다. 플랫폼에는 자식들이 살아 돌아오길 바라는 부모들의 울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술에 취해 이성을 놓은 학도병도 있었고, 자신이 친일파의 자손이라는 것을 자랑삼아 의기양양한 태도로 축하받는 이도 있었다. 


장준하는 일본군에 끌려가는 학도병들에게서 혼재된 한국의 모습을 체화하며 입술을 악다물었다. 그가 일본군에 지원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일본군에서 탈영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탈영한 뒤 임시정부로 가서 광복군이 되는 것이었다. 장준하는 이 같은 마음을 고향을 떠나는 날 환송회에서 소회를 짧게 밝혔다. ‘자기가 꼭 해야 할 일을 마치고 돌아오겠다.’ 그러나 그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자신의 결단이 가족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렸다.


조선총독부는 학도지원병제로 전쟁을 유지할 수 없게 되자 1944년 2월 8일 ‘현용징용’을 실시했다. 조선 내 공장이나 광산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모두 징용하고, 응징사(징용에 응한 전사)라는 호칭을 부여했다. 4월에는 ‘긴급학도근로동원방책요강’, ‘학도동원비상조치요강’ 등을 실시하고 국민학교(초등학교)부터 대학에 이르는 모든 학생들을 군수물자 증산, 군사시설 건설 등에 동원했다. 그것도 모자라 8월부터는 조선의 모든 남성을 대상으로 일반징용을 시작했다. 이들의 숫자를 모두 합치면 120만여 명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