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칼로 새긴 장준하

013. 의문의 죽음들 13 - 등신불, 정 중령 죽음의 비밀

이동권 2023. 8. 7. 16:49

김유진 기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어안이 벙벙해 말을 잇지 못하고 부릅뜬 눈으로 강동일 형사만 쳐다봤다. 강 형사가 부검의의 죽음을 알린 직후였다. 김 기자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검의가 죽음을 예감한 것 같네요. 앞으로는 선배를 만나러 가고, 뒤로는 저에게 정 중령 부검 서류를 보내왔어요. 심부름 온 사람은 수고비 받고 온 대학생이더라고요. 그에게는 더 이상 캐낼 게 없었어요.”


“사인은 뭐였어? 진짜 자살이 맞아? ”


“그게 좀 이상해요. 정 중령이 군사기관이 아니면 절대로 구할 수 없는 화학무기로 죽었거든요. 보툴리누스균이라고.”


김 기자와 강 형사 사이에 묘한 침묵이 감돌았다. 


진실은 언젠가 꼭 밝혀졌지만 그것이 진실이 되는 순간 커다란 파장을 낳았다. 진실을 희구하는 동시에 진실이 영원히 묻히길 바라는 이중성을 가지고 있는 게 사건사고였다. 


김 기자는 강 형사에게 부검의가 보낸 서류를 건넸다. 이수미 경위에게 받았던 부검소견서와 완전히 다른 버전이었다. 고의로 왜곡하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결과였다.

부검의 소견
목에 난 자상은 직접적으로 사망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피살자는 목을 베이기 전에 이미 죽은 것으로 사료된다. 피살자의 몸에서 출혈 흔적이 없고, 사건 현장에도 혈흔이 없는 것으로 봐서 사후경직이 상당히 진행된 뒤 예리한 칼로 목을 베인 가능성이 높다. 
피살자의 위와 식도에서 보툴리누스균이 발견됐다. 보툴리누스균은 식품을 매개로 전파되는 신경독소 박테리아다. 세계에서 가장 독성이 강한 생화학물질 가운데 하나로 뇌신경을 마비시켜 사망에 이르게 한다. 0.001mg만으로 성인 한 명을 죽일 수 있으며, 일단 감염되면 수 시간 안에 사망한다. 보툴리누스균은 땅속 물속 어디에서나 생명력이 강하다. 이 균은 화학전을 대비한 전쟁무기로  고위 군관계자조차 쉽게 구할 수 없으며, 현재 우리나라에는 연구용으로 소량 보유하고 있을 뿐이다. 
피살자의 혈액형은 B형이다. 피복과 몸에서는 피살자 것 외의 지문이나 혈흔은 발견되지 않았다. 보툴리누스균 감염 시간은 1975년 8월 19일 13시경으로 추정된다. 피살자의 손톱이 닳아질 대로 닳아 뭉툭해진 것으로 봐서 상당히 고통스럽게 사망한 것으로 판단된다.

사건의 윤곽이 선명하게 보였다. 윗선에서 하루속히 사건을 종결시키려고 했던 이유가 있었다. 강 형사는 정 중령이 자살한 게 아니라 누군가가 생화학무기로 오염시켜 죽였다고 생각했다. 보툴리누스균을 쉽게 구할 수 있는 세력이 장준하 또한 실족사로 꾸몄다고 추론했다. 


김 기자의 추리는 달랐다. 그의 칼끝은 보안사로 향했다. 그는 흑막 속에 파묻힌 사건의 실상이 모두 드러나 더 이상 궁금한 게 없다는 어투로 말했다. 


“정 중령이 보툴리누스균으로 죽었는데, 왜 목에 자상이 있을까요? 그는 두 번 살해당한 걸까요? 보툴리누스균으로 죽이려 했다면 굳이 목을 벨 필요가 없잖아요. 그게 정 중령이 뭔가를 알리기 위해 자살했다는 증거예요. 근데 그는 왜 보툴리누스균으로 자살했을까요? 무엇을 알리려고 했을까요? 제가 보기엔 어떤 세력을 까발리려고 한 것 같아요. 그 수장이 보툴리누스균과 연관된 것 같고요. 보툴리누스균에 대해 공부한 적 있어요. 이 균을 정제하고 희석해 안정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든 게 보톡스라고 하더라고요. 성형외과에서는 아주 흔하지만 그 본질을 파헤쳐보면 어마어마하고 무시무시한 무기인 셈이죠.”


김 기자는 잠시 숨을 돌린 뒤 말을 이었다.


“정 중령은 장준하를 죽이라는 명령을 거부한 뒤 신변에 위협을 느끼다 보툴리누스균을 삼켰어요. 저들을 세상에 폭로하기 위해 위험천만한 화학무기를 자살도구로 선택했지요. 언론에서 알게 되면 난리 나지 않겠어요. 저들은 장준하 죽음의 비밀을 알고 있는 정 중령을 죽이려고 했어요. 근데 그가 이미 싸늘하게 식은 시체인 줄 모르고 칼을 댄 거죠. 정 중령의 죽음을 단순 강도 살인으로 위장하려는 시도는 불발했어요. 부검 때 보툴리누스균이 발견됐거든요. 저들은 서둘러 자살로 부검 소견서를 조작하고 사건을 덮었지요. 그리고 정 중령의 죽음마저 은폐하기 위해 소영과 부검의도 제거했고요. 아마도 정 중령의 목에 칼을 댄 이들이 장준하 선생 또한 죽였을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이 사건은 논리적으로 설명이 안 돼요.”


강 형사는 김 기자의 추론이 앞뒤가 정확하게 들어맞아 맞받아칠 말이 없었다. 그는 김 기자에게 임일수를 만나 장준하를 죽인 세력이 누구인지 임일수에게 직접 물어보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임일수가 건넨 「칼로 새긴 장준하」를 펼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