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칼로 새긴 장준하

011. 의문의 죽음들 11 - 살해 위협, 불길한 전조

이동권 2023. 8. 7. 16:45

소영은 작은 소리에도 놀라 자꾸 힐끗힐끗 뒤돌아봤다. 큰소리가 들리면 아예 뒤돌아보지 않고 빠르게 걸었다. 죽더라도 칼을 들고 달려드는 자와 눈이 마주치는 고통은 피하고 싶었다.


커다란 고양이 한 마리가 쥐를 물고 살금살금 눈앞을 스쳐 으슥한 골목으로 사라졌다. 소영은 느닷없는 상황에 놀라 주춤했다. 작고 날쌘 쥐도 먹이사슬 앞에서는 처참한 능욕을 당하나 싶어 가슴이 더럭 내려앉았다. 고양이의 날카로운 이에 물린 쥐가 마치 자신 같았다.


페르시안 호텔 커피숍. 미행은 없었다. 얼씬거리는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소영은 급히 호텔 출입문을 밀었다. 빨간색 모자를 눌러쓴 호텔리어가 문을 쭉 잡아당겼다. 소영은 슬며시 고개를 숙이며 호텔 로비를 지나 총총걸음으로 커피숍에 들어갔다. 멀리서 사내가 반쯤 일어나 손을 흔들었다. 미리 나와 소영을 기다리는 강동일 형사였다. 소영은 소파에 앉을 때 엉겁결에 주위를 살폈다. 강 형사는 소영의 행동이 어딘지 모르게 불안해 보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며칠 전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 정상일 중령의 애인이 소영이라는 사실 때문이기도 했다.


“강 형사님. 제가 쫓기고 있는 것 같아요.”


소영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누가 쫓아와요? 왜 그렇게 안절부절못해요?”


“용건만 말하고 갈게요. 저는 며칠 전 뉴스에 나왔던 정상일 중령과 잘 아는 사이예요. 그이가 일주일 전부터 무척 괴로워했어요. 특수한 임무를 맡았다고 하더라고요. 큰일 같았어요. 누군가를 죽여야 할 명령 같은 거요. 제가 그러지 말고 얘기해 봐라 했는데 입을 다물더라고요. 삼일 동안 만나지 못했어요. 다방에도 들르지 않았고요. 저는 임무 때문에 그런가 보다 생각했죠. 17일인가, 그날 그이가 다방에 찾아와 송 마담과 다투더니 저에게 인사도 없이 그냥 나갔어요. 그런 적이 없었거든요. 집에 찾아가 보니 술에 잔뜩 취해 헛소리를 늘어놓고 있더라고요. 송 마담이 연락책이라느니, 자기는 손에 피를 묻히고 싶지 않다느니, 별의별 얘기를 다 하더라고요. 저에게는 당장 청다방을 그만두고 다른 직장에 다니라고 걱정하고요. 뭔가 일이 잘못됐다고 생각했어요. 두렵고 불길했지요. 그날 밤 장준하 선생이 실족사했다는 뉴스를 봤어요. 혹시 하는 의심이 들더라고요. 그리고 삼일 후엔 그이가 죽었어요. 송 마담의 표정도 달라졌고요. 저에게 굉장히 쌀쌀맞게 대하기 시작했어요. 저에게 미행이 붙은 것 같아요. 살해 위협을 느껴요. 그이처럼 저도 쥐도 새도 모르게 죽게 될 것 같아요. 저는 아무것도 모르는데 제가 뭔가 알고 있다고 생각해 죽이려는 것 같아요. 도와주세요. 강 형사님.”


피로와 낙망이 일순간에 엄습했다. 국과수에서 자살로 결론지은 사건을 재조사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소영의 말만 믿고 그녀에게 후배들을 붙여 신변을 보호해 줄 수도 없었다.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증거가 필요했다. 반박할 수 없는 확실한 근거를 내놓지 못하면 과도하고 일방적인 지시에 불과했다. 강 형사는 소영을 달래서 집에 들여보낸 뒤 홀로 커피숍에 앉아 온갖 상념에 젖어들었다.


다음날 아침 시경 안은 어수선했다. 전화기 벨소리가 수시로 삑삑거렸고, 낯선 사람들이 들락날락하며 시끄럽기까지 했다. 강 형사는 육감적으로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진 것을 알았다. 혹여 소영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닌지 저어했다. 


직감은 딱 들어맞았다. 소영이 삼청동 야산에서 목을 매고 숨진 것을 인근 주민이 발견해 신고했다. 관할 서에서 소영의 거주지 경찰서로 수사 협조 공문을 보냈고, 이 소식은 시경에도 전달했다. 그러나 수사는 정 중령 사건과 마찬가지로 급하게 종결됐다. 윤 반장은 전담반을 조직해서 정 중령 사건부터 다시 수사를 착수하겠다는 보고서를 올렸지만 퇴짜를 맞았다. 청장의 말 한마디에 사건 현장은 수습됐고, 소영은 신변을 비관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정리됐다.


강 형사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시신이 발견된 장소는 일반인들이 쉽게 드나들 수 없는 곳이었다. 사유지 쪽은 사나운 개가 입구를 지키고 있거나 철창으로 둘러싸여 출입이 어렵고, 국유지 쪽은 대부분 군인들이 보초를 섰다. 소영이 자살하러 들어가기엔 무리였다. 게다가 어젯밤 소영에게 들은 얘기도 있었다. 


삼청동이나 인근 지역에 거주하거나 근무하는 사람들의 소행일 가능성이 높았다. 상식 있는 사람이라면 사건 현장 주변을 샅샅이 훑어보고, 수집한 증거를 토대로 범인을 검거하는 게 옳았다. 그러나 소영의 죽음은 사망감정서 종이 한 장으로 단순 자살 처리됐다. 


강 형사는 믿지 않았다. 터무니없고 어처구니없는 결말이었다. 물증은 없었다. 이미 범인이 남긴 증거는 사라졌고, 수사는 종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흘렀다. 윗선에서 시킨 대로 수사를 끝내면 수고했다는 치하와 함께 상당한 회식비가 내려오고, 형사들은 소주 한잔에 돼지고기를 실컷 구워 먹으며 세상은 그런 거라고 자족하면 그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