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동일 형사는 정상일 중령의 사건 기록 서류를 옆구리에 끼고 청다방에 들어갔다. 송 마담이 통통하게 오른 볼살을 두 손으로 어루만지며 강 형사를 반갑게 맞았다. 송 마담은 한복과 기모노의 중간 정도로 보이는 옷을 입었다. 앞에서 보면 한복 같았지만 뒤에서 보면 영락없는 기모노였다. 강 형사는 송 마담의 인사를 받아 줄 기분이 아니었다. 정 중령 사건 때문에 마음이 무거워 대답하는 듯 마는 듯 손을 대충 흔들고 중앙테이블에 앉아 담배를 꺼내 물었다.
김유진 기자가 창가 자리에 홀로 앉아 독서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강 형사는 아는 척이라도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그냥 담뱃불을 붙였다. 이유는 같았다. 평상시에 기자들에게 잘 보여야 어려운 상황에 닥쳤을 때 조금이라도 도움을 받을 수 있었지만 정 중령 사건 때문에 골치가 쑤셔 억지로 웃기가 힘들었다.
강 형사는 정 중령의 죽음을 처음부터 짚어나갔다. 하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더욱더 미궁에 빠져들었다. 범인이 남긴 ‘2025를 위하여’라는 글씨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는 테이블 위에 사건기록 문서를 툭 던져 놓고 손바닥으로 머리 꼭대기 백회혈을 두드렸다. 몸도 무겁고, 지근지근 쑤시는 두통도 번개를 쳤다.
송 마담은 강 형사의 기분이 별로인 것처럼 보여 머뭇거렸다.
“강 형사님…무슨 일 있으세요? 낯빛이 안 좋아 보여요. 쌍화차 드릴까요?”
송 마담이 아양스럽게 향수 냄새를 풍기며 말했다.
“별일 아니에요. 신경 쓰지 말아요.”
강 형사는 귀찮은 듯 잘라 말했다.
“다른 사람은 속여도 저는 못 속여요. 제가 이래 봬도 눈썰미 하나는 끝내줘요.”
송 마담이 강 형사의 기분을 달래주려고 능청맞게 말을 붙인 것이 화근이었다. 마음이 풀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성질만 돋우는 꼴이 됐다. 그는 송 마담에게 버럭 목소리를 높였다.
“아이 참. 괜찮다니까요. 차나 줘요.”
“알았어요, 소영아. 형사님한테 쌍화 한 잔 올려.”
강 형사는 턱을 쳐들어 허리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았다. 송 마담은 교태를 부리듯 강 형사를 흘겨보는 척하면서 책상 위에 놓여 있는 문서를 유심히 살폈다.
강 형사는 도통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정상일 중령은 도대체 누구일까? 왜 그는 죽었을까? 국가권력이 저지른 일이라면 같은 편을 굳이 죽일 필요까지는 없다. 단순강도도, 치정 문제도 아니다. 개인적인 원한도 조사해 봤지만 별다른 게 없다.’
소영이 쌍화차를 탁자에 조심스럽게 내려놨다. 소영은 다방에서 일하기에 아까울 정도의 미모였다. 게다가 매우 지적이었다. 그녀가 어느 정도까지 공부했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지만 많이 배운 티가 눈빛에서부터 풍겼다. 하지만 소영은 강 형사가 좋아하는 스타일도 아니었고, 그는 여자에게 별 관심도 없었다. 땀으로 범벅돼 뒤엉키는 걸 그다지 즐기지 않았다.
강 형사가 찻잔을 들자 잔 밑에 계산서 용지가 놓여 있었다.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청다방은 차와 함께 계산서를 내놓지 않았다. 장부도 따로 만들지 않았다. 마담은 손님이 어떤 차를 마셨는지 일일이 기억했다가 나갈 때 액수를 불렀다. 그는 소영을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계산서 용지를 집어 들었다. 소영은 송 마담과 얘기만 할 뿐 그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강 형사는 네 번 접힌 계산서 용지를 폈다. 또렷한 윤곽의 글씨가 꺼뭇꺼뭇했다. 연필로 잔뜩 힘주어 쓴 글씨였다. 강 형사는 다시 한번 소영을 힐끗 쳐다본 뒤 글을 읽었다.
‘오늘밤 9시 페르시안 호텔 커피숍에서 만나요. 이상한 얘기를 들었어요. 만나서 얘기해요. 송 마담을 조심하세요. 이 편지도 비밀로 해주시고요. 소영이가.’
강 형사의 눈가가 살며시 떨렸다. 왠지 모르게 ‘송마담을 조심하라’는 말이 섬뜩하게 다가왔다. 동시에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익명의 제보는 거짓이 많았지만 얼굴과 이름을 밝힌 제보는 사건을 푸는데 결정적인 역할이 되곤 했다. 그는 쌍화차를 쭉 들이킨 뒤 쫓기는 사람처럼 다방을 빠져나오면서 소영을 한 번 더 쳐다봤다. 소영은 강 형사를 강렬한 눈빛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상당히 신빙성 있는 제보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눈빛이었다.
강 형사는 서점으로 향했다. 임일수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가 쓴 책을 읽을 필요가 있었다. 강 형사는 서점에서 임일수가 펴낸 책을 찾았다. 최근 출간된 책은 소설 「비밀조직」이었다. 그는 머리말이나 목차도 훑어보지 않고 표지만 쓱 쳐다본 뒤 책을 챙겨 들었다. 입을 열지 않고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임일수를 이겨보려는 심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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