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칼로 새긴 장준하

008. 의문의 죽음들 08 - 부검, 자살과 타살 사이

이동권 2023. 7. 21. 17:38

남청색 제복을 입은 이수미 경위가 힘차게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출입문을 밀고 나와 걸어왔다. 애타게 부검 결과를 기다리던 김철수 형사는 간이 소파에서 일어나 가볍게 눈인사를 건네며 부검소견서를 받아 들었다. 골치가 상당히 아팠지만 이 경위에게는 그런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 이 경위에게 호감을 갖고 있던 터였다. 그녀는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에 화장품 냄새가 항상 은은하게 풍겼다. 미소는 아름다웠고, 태도는 빈틈없이 발랐으며, 까다로운 일이 생길 때마다 뒤에서 묵묵하게 챙겨주는 스타일이었다. 


김 형사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정 중령의 부검 결과는 예상했던 대로 자살이었다. 그는 부검 결과서를 쭉 읽어 내려가며 체념한 듯 한숨을 후 내쉬었다. 


이 경위는 부검 결과의 타당성이 의심스럽다는 눈빛으로 말했다.


“부검 결과 좀 보세요. 자살이래요. 현장 사진 보셨죠? 목에 자상이 났는데 침대 어디에도 핏자국이 없었어요. 상행대동맥을 자르면 피가 엄청나게 많이 나올 텐데. 국과수 소견 대로 자살일 수 있지만 부검 결과가 조작됐을 가능성도 있어요. 국과수에서 부검 결과를 엉터리로 내놓을 때는 백 퍼센트 국가 권력이 자행한 거잖아요. 전 부검 결과가 조작됐다고 봐요. 아니면 이미 죽어 있는 정 중령에게 누군가가 칼로 목을 그은 것 같아요, 그러지 않고서는 사건 현장에서 혈흔이 발견되지 않을 수 없거든요.”


“정 중령 살해 사실을 감추려고 부검 결과를  허위로 작성한 것 같은데요?”


김 형사가 한마디 툭 던졌다. 이 경위의 마지막 추리가 너무 소설 같아서였다.


“그냥 제 생각을 말씀드린 것뿐이에요. 정 중령이 어마어마한 죽음 속에 감춰진 비밀을 스스로 드러내기 위해 자살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등신불이라고 있잖아요?”


“등신불?”


“일제 시절에 학도병으로 끌려간 남자가 중국 남경에 주둔해 있다 대학 선배를 만나요. 거기서 자신의 식지 끝을 스스로 물어뜯어 살을 떼어낸 다음 그 피로 ‘원면살생, 귀의불은(願免殺生 歸依佛恩)’이라고 써요. 살생을 면하길 원하며, 부처님의 은혜에 귀의하고자 한다는 뜻이죠. 남자는 대학 선배의 도움으로 일본군에서 탈출한 뒤 정원사라는 절에 숨어 들어가요. 거기서 등신불을 보죠. 분신해 죽은 만적 스님의 몸에 금을 씌운 불상요. 남자는 흉측한 형상의 등신불을 보고 깜짝 놀라요. 하지만 삶에서 가장 위대한 일은 헌신이라는 걸 깨닫죠. 정 중령도 등신불처럼 자신의 생명을 끊는 희생으로 뭔가를 알리려 했던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이 나라에서 어떤 음모가 벌어지고 있는지.”


김 형사는 이 경위의 얘기를 듣고 머릿속이 어지러워졌다. 그녀의 추리에 신빙성은 없었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는 선망 섞인 오기가 일었다. 자신은 절대로 떠올리지 못할 상상이었다. 그는 서둘러 시경으로 향했다. 강 형사에게 부검 결과를  빨리 알려주려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시경은 등 뒤로 수갑을 차고 걸어가는 한 무리의 대학생들로 장사진이었다. 볼과 입술은 터져 피가 바싹 말랐고, 눈두덩은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복날 개 패듯이 맞아 다리를 절룩거리는 학생도 있었다. 이들이 입은 옷에는 ‘유신철폐, 민주주의 쟁취’라는 단어가 쓰였고, 손에는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용지가 들렸다. 김 형사는 혀를 끌끌 차며 한 대학생에게 꿀밤을 때렸다. 다른 사람이 보면 대학생들의 반정부 시위를 못마땅해하는 듯 보였지만 의중은 달랐다. 시위는 해도 좋은데 잡혀오지만 말라는 당부였다. 이런저런 구실을 달아 고문을 받고 간첩이 될 수도, 운이 좋지 않으면 심하게 얻어터져 불구가 될 수도 있었다. 


띠띠띠띠이. 라디오가 정오를 알렸다. 대통령이 뉴스에 나와 ‘국론을 분열시키고, 국가 안보를 해치는 무리들이 공산주의자들의 재침을 자초할 것’라고 유신을 정당화하면서 ‘사회의 부정부패와 부조리를 근절하기 위해서라도 유신이 꼭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김 형사는 그 말을 듣고 피식 웃으면서 혀를 끌끌 찼다. 대통령은 북한의 도발 위협을 명분 삼아 유신철폐를 외치는 시위대들을 체제의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김 형사는 강 형사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어이 강 형사. 부검 결과 나왔는데.”


“뭐라고 나왔는데? 자살이라고 나왔지?”


임일수의 책에 빠졌던 강 형사는 김 형사 쪽으로 고개만 돌려 말했다. 


김 형사는 지방경찰청에서 서울로 전근 온 지 한 달 남짓 됐다. 김 형사는 강 형사보다 한 살 어렸다. 그래도 강 형사는 같은 기수이기도 했고, 나름 베테랑으로 실력을 인정받는 파트너였기 때문에 김 형사와 친구처럼 허물없이 지냈다. 그는 김 형사를 굉장히 자상하게 대했다. 김 형사는 5년 전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른 죄인이 눈먼 홀어머니를 모시는 것을 알고 형량을 낮추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동료 형사에게 피의자의 죄를 감춰 주려 한다고 고발당해 호봉도 깎이고 지방으로 쫓겨났다. 그 일이 벌어진 뒤부터 강 형사는 김 형사를 아꼈다. 그의 인간성을 믿었고, 동료에게 받은 상처를 감싸주려고 노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