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에 털털한 성격, 생글생글한 표정과 시원스러운 목소리는 누가 봐도 딱 연극배우다. 배우가 되지 않았다면 어떤 일을 했을까 생각해보니, 그래도 배우가 천직인 듯싶다. 아니면 공감능력이 뛰어나고 마음이 따뜻하니, 선생님을 해도 좋았겠다.
살면서 배우 김국희 같은 사람을 만나는 건 행운이다. 한효주 같은 외모에 신민아 같은 몸매는 아니지만 그녀에게는 사람을 빨아들이는 매력이 있다. 그녀가 내로라하는 인기 배우들 틈에서도 여러 작품에 계속해서 콜을 받고 있는 이유다. 진지하고 능글맞은 그녀의 연기는 한순간에 관객을 압도할 만큼 폭발적인 에너지로 가득하다.
김국희는 대학로가 공인하는 할머니다. 그녀만큼 할머니 연기를 잘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 동료 배우들의 중론이다. 배우에게 이미지가 굳어지는 것은 어쩌면 ‘트라우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남들이 인정해주는 뚜렷한 ‘한방’이 있는 것이니 꼭 나쁘다고 할 수는 없겠다.
김국희는 뮤지컬 <빨래>에서 주인 할머니로 등장해 가슴 찡한 연기를 선보였다. 이 뮤지컬로 김국희는 ‘국희할매’라는 별명이 생겼다. 그녀는 또 뮤지컬 <당신이 잠든 사이>에서 할머니 환자 이길례 역으로 분해 관객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렇다고 그녀의 젊은 여자 연기가 할머니보다 못한 것은 아니다. 모든 연기에 기본적인 함량을 보장하되, 그녀에게만은 특징되는 것이 첨가돼 있다.
중언부언은 생략하고, 정작 그녀 자신은 ‘대학로 할머니’라는 평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트라우마요? 극복했지요. 뮤지컬 <빨래>를 할 때였어요. 공연이 끝난 뒤 관객이 저에게 ‘오래 사세요’라고 인사하더라고요.(웃음) 어렸을 때는 예쁘다는 말을 듣고 싶었는데, 오래 하다 보니 지금은 괜찮아요. 연기를 잘하는 배우라는 말이 더 듣기 좋고, 어떤 역할이든 최선을 다하고 싶어요.”
뮤지컬 <당신만이>에서 김국희에게 어김없이 할머니 역할로 섭외가 들어왔다. 하지만 이 뮤지컬은 30대 아줌마부터 70대 할머니 역할까지 모든 세대를 혼자 소화해야 하는 역할이다. 내공이 만만치 않으면 관객들의 동화를 이끌어내기 힘들다.
김국희는 마치 자신이 겪어왔던 과거의 여러 장면들을 펼쳐놓는 것처럼 능청스럽게 연기했다. 막강 코믹 연기로는 조금은 단조로울 수 있었던 분위기를 살려냈고, 죽음을 앞두고 지나온 날을 회상하며 풀어내는 자조와 가슴 아픈 내면 연기는 관객의 눈물을 쏙 빼놓기 충분했다.
김국희는 이밖에도 <지하철1호선>, <락시터>, <짱따>, <인어공주>, <방황하는 별들> 등 다양한 작품에 출연해 맛깔스러운 연기로 관객들을 웃기고 울려왔다.
언제나 삶은 젊은이들에게 관대하다. 뭘 하더라고 다시 고쳐 살만한 시간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또 그 과정에서 겸손과 참을성도 배우게 되니 ‘젊어서는 사서도 고생한다’는 속담도 생겼다.
하지만 오랜 시간 동안 한 분야의 일을 고집한다면 뭔가 남다른 신념이 있는 것으로 읽힌다. 고단한 삶의 수업을 거쳐 오면서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뭔가를 그 일에서 발견한 것이겠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데뷔 시절 얘기를 들려달라고 하니 쑥스러웠다.
인생에는 다양한 길이 있지만, 인생이란 자신만이 선택하고 바꿀 수 있다. 어느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고, 타인을 원망할 수도 없다. 그래서 가끔 배우들을 만나면 왜 배우가 됐는지, 그것이 가장 궁금해지곤 했다.
“공연을 상당히 좋아했어요. 배우가 되고 싶었는데 연기학원에 다니려면 너무 비쌌어요. 청소년 극 오디션에 도전해 합격하면서 2001년부터 연극을 시작하게 됐어요. 배우로 성장하기까지 힘든 일도 많았지만, 어떤 일이든지 다 똑같아요. 알잖아요? 버텨야 한다는 거.”
인생은 지긋지긋한 시간의 연속이다. 사람들은 기쁨이나 즐거움만 느끼고 싶어 하지만 세상은 만만치 않은 일상으로 넘쳐난다. 결론은 반성하지 않으면 진정한 행복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결론이다. 무엇이 잘못됐더라도 자신을 성찰하고, 이타적인 마음으로 나누고, 대의에 방향을 두고 살아야 끔찍해지지 않는다.
연극배우의 생활, 물론 녹록지 않을 것이다. 꼭 돈이 없어서가 아니다. 아무리 좋아서 시작한 일이라도 진정으로 행복을 느끼고 있는지 의심의 순간은 찾아오게 돼 있다. 거기에다 돈 문제까지 겹치면 ‘접어 말어’ 단계까지 가게 된다. 당차고 의기양양한 김국희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도 이런 종류의 고민을 늘 반복적으로 해왔다.
“출연료가 쌓여 받질 못했어요. 그 당시 집안에 일이 있었는데, 그 일을 해결할 수 있는 액수와 똑같았죠. 답답한 마음에 돈을 벌어보지는 마음으로 1년 동안 눈을 돌렸어요. 하지만 다시 무대로 돌아오고 싶었어요. 연기를 하고 싶었죠. 다시 돌아가기가 쉽지 않았어요. 오디션부터 다시 보기 시작해서 뮤지컬 <지하철 1호선>에 출연하게 됐어요. <지하철 1호선>에서 마약중독에 걸린 늙은 창녀 역할을 맡았어요. 어린 나이에 욕심이 생겨서 잘하려고 하다 보니 생각처럼 잘 되지 않더라고요.”
배우는 다른 사람의 삶을 사는 직업이다. 작가의 철학이 녹아들어 가고, 배우의 연기로 심화되며, 관객들의 감동으로 점화되는 예술이다. 김국희는 수많은 작품에 출연하면서 다종 다양한 삶을 목도하며 살아왔다. 자신의 삶 또한 무대에 올려놓고 객관적으로 보는 시간도 가져봤을 것이다.
“여배우로 살기가 ‘폭폭’해요. 배역도 줄어들고, 다양하지 않아요. 그런데 왜 돌아왔을까요. ‘내가 정말 행복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감사하다는 마음을 관객들에게 전달하고 싶어요. 당신의 삶을 존중하며, 당신을 응원한다고 얘기하고 싶어요. 선배님들은 이런 얘기를 많이 하셔요. 연극은 혼자가 아니라 함께 하는 것이라고요. 그것도 연극을 하면서 느낀 거예요.”
김국희는 어떤 배우가 되고 싶을까. 어디 가서 무엇을 하든지 마음을 다할 것이라는 확신은 든다. 이성보다 열정이 앞서는 배우이고, 도전을 받아들일 준비도 된 것 같다. 게다가 성공을 위해 잠시 쉬어갈 줄 아는 여유도 있다.
“엄마가 드라마를 보면서 저 배우는 어떤 성격인 것 같다고 말씀하셨어요. 기술적인 면은 노력해야 하지만 먼저 좋은 사람, 좋은 배우가 돼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악역이더라도 공감이 가고 설득력 있는 배우들이 있잖아요. 유명해지고 싶어요.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도 많이 벌고, 많은 사람들이 제 연기를 봤으면 좋겠어요. TV에 나오고 유명한 공연을 해서가 아니라 남도 땅끝마을 사람들도 아는 배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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