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돈의 맛’을 보고 기분이 더러워지지 않는다면, 아랫도리가 무거워지면서 혀를 내 차지 않는다면, 아니 이 영화를 보고도 체제 전복을 꿈꾸지 않는다면 정나미가 떨어질 것 같다. 팔다리 잘린 시체, 썩어가는 음식, 곪아 터진 상처를 보는 것처럼 ‘구토를 유발하는 사실’을 목도하고도 부조리한 우리 사회와 억압돼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말이다.
‘돈의 맛’에는 강렬한 끌림이 있었다. 자극적인 단어, ‘돈’과 ‘맛’에 압도됐다. 이러한 끌림은 제목이 내포하고 있는 어떤 의미에서 비롯된 것이라 해야 정확하다. 욕망의 근원까지 삼켜버릴 돈의 위력, 돈을 둘러싼 섹스와 부정의 텍스트, 일상에서 발견할 수 없는 최상류층의 생활이 숨김없이 까발려지는 낯 뜨거움은 호기심을 끝없이 자극하기 충분했다.
임상수 감독과의 세 번째 만남이었다. 한 번은 좋았고, 한 번은 아니었다. 영화 ‘그때 그 사람들’이 끌어내지 못했던 시대적 사명감에 무척 실망했지만 영화 ‘바람난 가족’을 마주하면서 임 감독의 실력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와 가졌던 두 번의 만남은 ‘그저 그렇고 그랬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뭔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던 만남 정도가 좋을 듯싶다.
세 번째 만남은 ‘돈의 맛’이었다. 그러나 그 시작은 너무도 밋밋했다. 자칫 영화의 소재나 구성이 스토리를 이끌어나가는데 지루함을 줄 수 있겠다는 걱정까지 들었다. 어찌 보면 최상류층의 삶은 소설이나 드라마가 늘 차용하는 소재인 데다, 자기모순에 의해 부서지고 마는 결말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30여 분이 흐르자, 그런 걱정은 사라지고 이 영화만이 가진 독특한 매력 속으로 빠져 들었다.
하녀 ‘에바’의 엉덩이를 떡 주무르듯 농락하는 백윤식(윤회장)의 능청스러운 탐욕, 가신 주영작을 “가만 있어”라고 날름 핥아먹어버리는 윤여정(백금옥)의 표독스러운 탐욕, 거부할 수 없는 돈의 위력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덧씌우며 위로를 받는 김효진(윤마니)의 애절한 탐욕, 돈이 세상이 전부인 재벌 2세 온주완(윤철)의 냉소적인 탐욕, 정말로 돈의 맛을 보고 싶어 눈이 멀어버린 김강우(주영작)의 선망 어린 탐욕. 이 영화가 보여주는 탐욕의 방향과 움직임은 방향은 너무도 뻔하고 뻔뻔했지만 돈과 섹스와 권력과 욕망의 함수관계를 조명해내는 임상수 감독의 연출은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 영화는 ‘돈의 흐름’을 종교적인 의례처럼 의식화했다는 점이 돋보였다. 재벌의 원초적인 본능을 충족시키는 일상의 세계, 권력을 가진 자의 폭압과 지배에 ‘모욕’당하는 사람들, 늙은 여자와 그녀의 불타는 자본주의적 욕망을 정당화시키는 사회 구조가 숨 막히는 성찬식처럼 느껴지게 했다. 또 차갑고 싸늘하게 늘어지는 대화, 가해자의 폭력에 갇혀버린 피해자들의 공간, 욕망을 쫓는 자와 섹스에 중독되어 가는 사람들 그리고 시종일관 호화로움으로 무장했지만 어둡고 침울한 느낌을 주는 미장센은 압권이었다.
그러나 어딘가가 부족했다. 제목이 주는 자극의 ‘격’을 따라가지 못한 겸손이 ‘돈’과 ‘맛’에 대한 기대를 살포시 깨뜨렸다. 색다르지 않은 폭력과 죽음의 색채, 파격적이지 않는 정사 장면,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 조연들, 진부한 라스트 신 등은 관객들에게 영화를 좀 더 감각적으로 이해시키고, 강렬한 충격을 주는데 아쉬움을 남겼다. 그래서 이 영화가 좀 더 자극적이고, 좀 더 비인간적이고, 좀 더 병적이고, 좀 더 우리 사회와 격리되도록 표현해냈다면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는 또 감각적이지만 반면 매우 차분했다. 엽기적인 애정행각도 보여주는 듯 마는 듯했고, 고전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아이디어를 리바이벌했을 뿐이었다. 차라리 정치와 돈과 섹스에 대한 이야기를 더욱 극대화해 성기와 누드를 우람한 장식처럼 잘 보이게 매달아 놓았으면 좋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돈의 맛’은 임상수 감독이 늘 표현해내고자 했던 정치와 권력, 돈과 성에 대한 주제의식에는 흔들림이 없다. 성에 대한 욕망을 앞장 세워 현실을 통렬하게 비판하는 날카로움은 여전히 매섭다. 이 영화를 보고도 임상수 감독에게 체제 전복에 대한 의도가 없다고 얘기한다면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다.
할리우드 상업영화나 식상한 한국 코믹영화, 습관적인 해피엔딩 영화에 질린 분이라면 꼭 권하고 싶다. 우리의 일상이 누군가에게는 웃음거리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조명해내는 소중한 시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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