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꿈처럼 재빠르게 지나간 시간이었다.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면 누런 옷을 입었다 보랏빛 황혼이 드리우면 일순간에 색을 바꾸는 사막의 카멜레온처럼 허망하고 위태로웠다. 흙바람이 불어오는 옹성에서 조나라의 10만 대군을 막아내는 묵가 '혁리'의 지략도, 중국 대륙을 통일하기 위해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벌이는 조나라 장수 '항엄중'의 투지도, 성에가 두껍게 낀 창문처럼 어둡고 침잠했다.
이 영화가 얘기하고 있는 평화란 과연 무엇일까?
혁리는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전쟁터에서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외친다. 아군이든 적군이든 '사람'이 죽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평화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하지만 그는 전쟁을 치르지 않으면 침략자에 의해 삶의 터전이 사라지고, 항복은 곧 피비린내 나는 살육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는 침략자의 노예나 노리개가 되지 않기 위해 눈물을 흘리면서 절체절명의 전쟁에 매달린다.
전쟁은 이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에게 상처를 주었다. 승자도 패자도 없었으며, 승패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슬프게 했다.
오랜만에 사랑의 질감이 느껴지고, 가슴이 찡한 영화를 한 편 봤다. 첫 도입부부터 좌중을 압도하는 음악과 전쟁 장면은 참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현란한 컴퓨터 그래픽과 액션으로 관객들의 눈을 휘둥그렇게 하는 영화가 아니라 '생얼'처럼 꾸밈없는 정공법으로 만든 잔잔한 감동이었다. 자칫 할리우드 영화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밋밋한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반지의 제왕이 줄 수 없는 인간미와 명상은 '묵공'만이 가지고 있는 큰 장점이다.
서운한 점은 있다. 묵가의 '혁리'와 조나라 '항엄중'의 지략싸움과 전술이 좀 더 다양하게 전개됐으면 하는 안타까움이다. 마지막 부분에 둘이 만나 전쟁의 승패를 결정 짓는 '독대'를 제외하고는 궁금증과 상상력을 불러일으킬만한 두뇌 싸움은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 또 영화에서 혁리만을 크게 부각시킨 점도 영화의 재미를 감하는 요인이 됐다. 혁리는 전쟁을 바라지 않는 평화주의자이지만 전쟁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은 인물이다. 항엄중은 조나라의 침략자이기 이전에 혁리를 존재하게 만드는 반동 인물인 셈이다. 그가 있어야만 혁리의 가치도 높아진다. 인물은 또 다른 반동 인물 때문에 더욱 빛이 나는 법이다. 이러한 점에서 '묵공'은 항엄중의 역할을 제대로 부각하지 못했다.
춘추전국시대. 천하 통일을 눈앞에 둔 조나라 10만 대군이 연나라로 가는 길목에서 만난 조그만 양성 함락을 눈앞에 두고 있다. 양성에는 고작 4천여 명밖에 없었다. 이들은 하는 수 없이 평화와 평등을 주창하는 '묵가'에게 지원 부대를 요청한다. 그러나 '묵가'에서 단 한 사람의 지원군이 도착한다. 그 이름이 바로 '혁리'다. '혁리'는 유가의 형식주의와 계급주의에 반발해 새롭게 탄생한 묵가의 현자다.
묵가 사상의 핵심은 겸애와 평등이다. 겸애는 자신과 다른 사람을 동등하게 대우하는 것이며, 사회가 혼란에 휩싸이고 서로 죽이며 전쟁을 일으키는 원인을 서로 사랑하지 않는데에서 연유를 찾는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 아끼고, 서로의 이익을 생각한다면 사회는 평등과 안정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유가의 애(愛)와 비슷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애는 차등적이고 친소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묵가의 겸애는 평등하고 상호 간의 이익을 더욱 중요시한다. 또 묵가는 전쟁이 의롭지 못한 것이며, 겸애의 원칙에 위배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평화를 지키기 위한 방어적인 전쟁은 반대하지 않았다. 때문에 양성이 묵가에 원병을 청했다.
양성 사람들은 초라한 행색의 혁리를 비웃는다. 그러나 혁리는 화살 한 발로 조나라의 기를 꺾으며, 양왕에게 병권을 인계받는다. 그리고 연이은 전투에서 묘책을 고안해 조나라의 공격을 막아낸다. 그럼에도 혁리는 정의롭고 겸손하며 진실한 사랑으로 백성들을 지휘한다. 하지만 혁리는 우유부단한 양왕과 양성의 병권를 책임지는 우자장의 모략으로 내우외환을 겪는다. 백성들이 점점 혁리를 따르자 자신의 위치가 위태로워진 귀족들은 혁리를 역모로 몰아 제거할 계획을 세운다. 혁리의 진심을 믿는 공자(양성 왕의 아들)는 그의 도피를 돕는다. 혁리와 함께 성 밖으로 나온 공자는 끝내 양성 궁수들이 쏜 화살에 맞아 숨진다.
조나라 장수 항엄중은 혁리가 없는 양성을 공격해 성을 함락한다. 하지만 그는 혁리 때문에 부하를 많이 잃었고, 성을 함락시키는 것보다 혁리를 이기는 것이 진정한 승리라고 여긴다. 항엄중은 혁리에게 성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양성 사람들을 죽이겠다고 협박하고, 끝내 혁리는 성으로 돌아와 항엄중과 창검이 없는 승부를 치른다.
과연 이 둘의 대면은 어떻게 될 것인가...
'목공' 영화의 볼거리는 한국 배우들이다. 홍콩의 대스타 유덕화와 최고의 CF스타 판빙빙의 빈틈없는 용모와 연기력도 볼만하지만, 조나라 대장 항엄중으로 출연한 배우 안성기와 양왕의 아들로 등장하는 슈퍼주니어 멤버 최시원이 특히 눈에 띈다. 안성기는 카리스마 넘치는 눈빛과 절제 있는 연기로 영화의 품위를 높였으며, 최시원은 단단하고 탄탄한 용모와 연기력으로 스크린을 압도했다.
흙먼지가 날리는 광활한 광야에 세워진 세트장도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한다. 세트장에는 바람과 먼지를 막기 위해 수천 그루의 미루나무를 심었고, 황톳빛 성벽과 거대한 종이 달린 성루, 두 개의 망루가 있는 문과 해자가 웅장함을 과시한다. 또 백성들이 살았던 마구간, 농가, 지하감옥, 왕의 거처인 궁전 등 실제 크기로 만든 세트장은 상암월드컵경기장보다 더 넓은 66000제곱미터(약 2만 평)의 규모를 자랑한다.
조나라가 양성을 공격하는 장면도 압권이다. 이 장면에서는 400필이 넘는 말과 1천 명의 마부를 포함해 1,400여 명이 인원이 참여해 전쟁신을 만들었다.
묵공을 재밌게 보기 위해서는 '묵가'사상을 조금 공부해두면 좋을 듯싶다. 그래야만 힘겨운 전쟁을 치르기 위해 홀연 단신으로 찾아온 혁리의 용기와 내적 갈등의 원인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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