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내가 만난 사람

박찬용 조각가 - 차갑고 거친 우리 시대의 욕망과 상처

이동권 2022. 9. 26. 14:50

박찬용 조각가


인간의 과도한 욕망은 언제나 삐뚤어진 모습으로 발전한다. 산을 생각해보자. 벌목을 하고, 사냥을 하고, 경작을 하기 위해 산을 바라보면 산은 더 이상 산이 아니다. 오히려 갖가지 사정과 근심을 만들어내는 ‘경제적인 문제’가 된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바라지 않고 산을 바라보면, 그곳에서 멋진 숲과 나무의 영혼을 볼 수 있다. 

인간과 인간 사이도 마찬가지다. 어떤 욕구와 두려움, 목적이나 의도를 가지고 서로를 바라보면 조바심과 의구심만을 만들어낸다. ‘저 사람은 나를 호의적으로 생각할까’ ‘그는 나를 이해할까’ 등등 이러한 바람과 의문을 가지게 되며, 더 이상 서로의 관계가 훌륭한 것으로 발전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의 경우는 인간의 인품이나 거동을 보고 모순점을 찾아내게 되면 스스로 그 사람에 대해 모든 것을 터득한 듯이 자만해지고, 무시하게 된다. 이러한 견해는 매우 비천한 관점이다.

욕망을 멈춘 채 순수하게 관찰하고 관심을 가지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 불순한 것은 모두 멈추고 아름다워지며, 모든 것이 신비로운 존재로 변모한다. 왜냐면 관찰과 관심은 비판이나 연구가 아니기 때문이다. 

박찬용 작가는 작품 ‘가까운 것들의 관계’, ‘마주 보는 개들’, ‘막이 오르다’, ‘서커스’, ‘열등한 것들의 도전’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일관된 주제의식을 가지고 작업한다. 소재는 매번 다르지만 삶의 본성과 그것에 내재된 욕망을 묘사한다. 게다가 그의 작품은 매우 사실적이고 거칠다. 그 안에서 발견하는 삶은 투견장, 서커스장처럼 극적이고 강렬하며, 우리 모두가 생존을 위해 투쟁하는 존재로 형상화돼 있다. 그 와중에 동물들은 야성을 거세당하고, 인간은 남근을 거세당한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보면 뭔가를 갈구하고 있는 강한 욕망이 느껴지지만 이들이 보여주는 욕망은 여태껏 본 적이 없는 슬픈 것이다. 계획적이거나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기보다 사회적으로 억압받고 소외당하면서 꿈틀대는 아픔이 변이된 것 같다.

박 작가의 작품 ‘아메리칸 핏불테리어’는 상대방이 죽을 때까지 싸우는 맹견이다. 이 개는 순종개가 아니다. 인간이 모든 우성인자를 결합해 만든 개량종 투견이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인간의 욕망과 폭력에 대해 말하고자 했다.

“투견장에 나가면 모르는 상대보다 서로 아는 개들끼리 더욱 잔인하게 싸운다. 회교와 기독교가 가장 가까운 종교인데도 제일 다툼이 심하다. 과학과 종교도 필요한 것이지만 사람을 때론 힘들게 한다. 과학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사람들은 원자폭탄이나 전투기처럼 사람을 죽이는 무기를 먼저 만들지 않느냐. 하지만 폭력이 나쁘다고만 얘기할 수는 없다. 발전의 원동력이 됐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좋지 않다거나 질환이라고 생각하면 병에 대해 인정하고 치료를 받아야 한다. 우리 사회가 아름답기만 하고, 예쁜 여자만 있고, 잘생긴 배우만 있지 않다는 것을 작품에 드러내고 싶었다.”

그는 작품 ‘서커스’에서 좀 더 인간의 실존적인 문제에 대해 접근했다. 이 작품에는 조련사와 무희, 차력사와 다양한 동물들이 등장한다. 동물들은 조련사에 의해 길들여져 본성을 거세당한 채 강요된 웃음을 선사한다. 조련사들과 광대들 역시 관객들의 욕망에 의해 인간성을 거세당한다. 이들은 보란 듯이 벌거벗은 채 남근을 과시하고 있지만, 이 남근은 권력이나 욕망의 증거라기보다는 완전한 거세에 가깝다. 조련사에 길들여진 동물이 더 이상 야생이 아니듯이 광대들 역시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그가 이 작품을 통해서 얘기하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길들여지지 않는 야성의 회복이다.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존중받기를, 서로 어우러져 살아가기를 바란다. 다중적인 모습으로 서로 가장하며 살아가는 이 시대에 가식의 가면을 벗고, 부끄럽지만 그 실체를 드러내고 얘기해야 한다는 소망이다.

그의 작품을 보면서 두 가지 의문이 들었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의 얼굴이 작가를 닮은 점이다. 또 기존의 조각과 다르게 그의 조각은 틈 사이로 내면이 훤하게 보이는 점이다.

“광대의 얼굴은 내 얼굴이 맞다. 스스로 잘 살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가끔씩 열등감이 느껴져 힘들어하는 내 모습을 서커스에 나오는 난쟁이로 표현했다. 성기도 많이 과장되게 만들었다. 수놈들의 욕망을 표현하기 위해서다. 열등하다고 해서 욕망이 없진 않다. 그리고 내 작품은 겉으론 형상성이 있지만 몸체가 갈라져 있어 안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분열의 시대, 껍데기에 불과한 우리 사회의 모습을 형상화하기 위한 의도다.”

콜렉터들은 아름답고 부담 없이 걸 수 있는 작품을 좋아한다. 요즘은 젊은 작가들의 작품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그런 면에서 보면 박 작가의 작품들은 구매력이 상당히 떨어진다. 그가 파주 작업실에서 나에게 건넸던 말이 생각난다.

“부유층은 있어도 상류층이 없다는 말이 있다. 콜렉터들은 좋은 작품이 많아도 대학교수나 갤러리에서 권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선호한다. 미술을 바라보는 안목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내 작품을 알아주는 사람들이 도움을 주고 있어 그리 어려운 형편은 아니다. 순수예술에 더욱 관심을 가져줬으면 한다. 아이들과 함께 전시장에 한 번 가봐라. 그 친구들이 기성세대가 된 뒤 문화를 소비하는 계층이 될 것이다. 지도층이 되면 세상을 바꿀 수도 있다. 즐기는 것이 우선이겠지만 미술작품 감상은 자녀들한테도 좋은 교육이 될 것이다. 미술이 심오하거나 위대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작가가 자신의 생각을 다른 사람들에게 얘기하는 방법 중  하나다. 미술에 대해 이해력이 부족한 사람들이나 어린이들은 제 작품의 형상만 보고 재밌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