털. 그것도 열일곱 살 일호(소설 주인공)의 털. 야릇하고 눈부신 상상이 머릿속에 가득하다. 입술도 달싹거린다. 사는 동안 언제나 흥분과 설렘을 안고 사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털’에 관해서는 예외다. 애벌레가 껍질을 벗고 나비가 되는 순간처럼 털에 대한 관심은 인간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죽는 날까지 갖게 되는 묘한 감정이 아닌가 싶다. 털은 성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그대로 투영하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제6회 사계절문학상 대상작으로 선정된 김해원 작가의 소설 ‘열일곱 살의 털’을 심사했던 위원들도 주위 눈치를 보며 몰래 작품을 읽었다. 털에 대한 미묘한 감정 때문이리라. 하지만 심사위원들은 그 ‘털’이 어느 순간 머리털이라는 것을 알고 흥미가 뚝 떨어질 무렵 다시 재밌는 털 이야기가 시작돼 책을 놓을 수 없었다. 김 작가에게 나도 “그러했다”고 털어놓자 그는 대뜸 웃어버렸다. 별다른 생각 없이 머리털 이야기를 풀어놓은 그에겐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로 들릴만하다.
평범한 아이를 통해 바라본 우리 사회의 억압
‘일호’는 매우 평범한 아이다. 보통 청소년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처럼 공붓벌레도, 문제아도 아니다. 혹독한 가난에 시달리거나 집안의 갈등으로 가슴앓이를 하는 아이도 아니다. 주인공이 되기에는 너무나 문제가 없어 보인다. 이런 일호가 성난 사자처럼 두발규제 싸움에 뛰어들었다. 왜일까. 일호는 학교가 인정하는 모범 두발로 아이들 사이에서 ‘범생이 1호’로 통했다. 하지만 일호는 체육 선생이 두발 규정을 어긴 친구의 머리에 라이터를 들이대며 위협하는 것을 보고 참을 수 없었다.
매독(체육선생의 별명)이 악을 쓰며 밀어뜨리고 닥치는 대로 발로 걷어차도 나는 내 손아귀에 있는 손목을 놓지 않았다. 나는 미친개를 물어뜯는 단단히 미친 개였다. 엄마 나, 단단해진 것 맞나요? 나는 손목이 빠져나가려고 버둥거릴수록 더 다부지게 파고들었다. 매독은 발길질을 하다 잠시 숨을 고르더니 나를 손목에 매단 채 잡아끌면서 온갖 욕을 퍼부었다.
두발 규제에 대한 김 작가의 생각은 어떠할까. 딸을 키우는 학부모의 입장에서 물었다.
“딸이 염색한 것을 보면 예쁘지 않았다. 미는 주관적이지 않는가. 나는 딸이 예쁜 것을 했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게 뭐냐’고 막고 싶지 않다. 학교에서는 규제를 풀면 염려할 정도의 문제를 일으킨다고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딸이 교복도 지나치게 줄여 입었다. 학교에서 말이 많아 다시 교복을 사줘야 했다. 아이들은 21세기인데도 학교교육은 아닌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했지만 아이들은 달라졌다. 하나의 유행에 불과하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모든 학생들이 똑같은 머리 모양과 복장을 한다. 아이들은 나름대로 어른들과 다르다고 영역표시를 하는 것이다. 입시와 학교의 규제에 억압되고 자아에 억눌린 게 표출된 것이다. 그래서 그게 예뻐 보이는 것이다. 그걸 가지고 뭐라 하고 싶지 않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통해 세상을 껴안다
일호는 태어나기 전부터 아버지가 집을 나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할아버지가 굳건하게 역할을 대신하며 부성의 결락이 전면적으로 부각되지는 않지만 일호에게 아버지는 ‘분명히 있는데 느낄 수 없는’ 존재다. 그러나 일호가 학교에서 두발규제로 문제를 일으킨 순간 아버지가 돌아온다.
“일호의 아버지는 이발소에서 일하다 집을 나갔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이발소에서 일하려니 얼마나 갑갑했겠는가. 그래서 세상에 발을 딛지 못하고 부유하게 됐다. 하지만 아들을 보고 제자리에 돌아왔다. 마침내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깨닫게 된 것이다. 일호는 우리가 흔하게 생각하는 아버지와 다른 모습의 아버지를 가슴으로 받아들이면서 자기 자신 그대로를 사랑하게 된다. 서로 다른 머리 모양처럼 삶의 다양성을 인정하자는 얘기다.”
일호가 두발규제를 반대하는 1인 시위를 시작할 무렵 할아버지도 역시 외로운 싸움의 길로 들어선다. 할아버지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이발소인 태성이발사를 3대째 이어오는 이발사다. 마포구 도원동 일대의 재개발을 놓고 주민들 의견이 찬반으로 갈리자 처음에는 나라를 위해 하는 일을 반대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재개발로 주민들이 고루 덕을 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뒤 세입자 대책위원회에 합세해 시위에 나선다.
“일호 할아버지는 평범한 사람이다. 싸워본 적도 없고, 나라가 하라는 대로 살았다. 그래도 그냥 순응한 게 아니다. 나름대로 미래 가치관이 있었다. 하지만 그 미래가 순응해서는 이뤄질 수 없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됐다. 처음부터 싸움꾼, 투사도 아니었지만 누구나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세상과 싸워야 하는 이유
김해원 작가는 고종이 단발령을 내렸을 때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며 상투를 자르던 ‘체두관’이라는 관직에 호기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이 작품을 구상하게 됐다. 우리 역사에서 머리털이 갖는 상징성을 고민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중고등학교에서 시행되고 있는 두발 규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 그는 실제 학교 정문에서 두발 규제 반대 시위를 했던 이하람(중앙고등학교 3년) 군을 만나 경험담을 듣고 주인공 일호의 캐릭터를 형성하는 데 도움을 받았다.
“요즘 아이들도 국가, 학교로부터 폭력을 당한다. 머리가 짧으면 탈선이 줄어든다는 이유다. 통계조차 없지만 아이들이 그렇게 길들여지고 있다. 책을 통해 담고자 했던 것은 국가가 통제하려고 했지만 그 자리에서 끊임없이 싸우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의 가족과 주변을 보면서 세상과 싸워야 된다는 것을 체득하는 것이다.”
그가 머지않아 들려줄 이야기는 우정이다. 서커스 단체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인간과 인간이 갖는 동료애다.
“장르를 구별해서 쓰려는 건 아니지만 굳이 장르를 나누자면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소설이다. 내가 글을 쓰는 목표는 아이들에게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다. 아이들이 어른이 되기 전에 살면서 겪는 것, 그 사람의 삶을 인정하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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