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압감이 느껴지는 구조물 사이사이 텅 빈 공간에서 하얀 광채가 부서졌다. 금방이라도 햇빛과 달빛이 빈 공간으로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았다. 아무런 감흥마저 불러일으키지 않을 만큼 삭막한 이미지였지만 이상하게도 심장이 마구 두근거렸다. 평소 관심을 가지고 지켜봤던 곳이 아니었기에 충격은 더욱 컸다. 하늘 높이 솟아오른 주상복합건물, 호텔, 백화점, 아파트 사이로 보이는 빈 공간이 이 같은 감성을 끌어내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모닥불이 튀는 소리처럼 귓가를 소스라치게 하는 느낌은 가슴 한편에서 완전히 꺼지지 않았다.
으레 그렇듯이 도시 문명은 현기증을 유발하는 이미지였고, 가끔은 모든 감각을 마비시킬 만큼 아찔한 형상이었다. 비가 내리는 밤마다 등줄기가 빛나는 산맥과 코를 습하게 달구는 해변이 떠올랐던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하지만 홍상현 작가와 대화를 나누면서 그러한 염려는 산산이 부서졌다. 예의 바르고 건실한 그의 성품 때문만은 아니었다. 더할 나위 없는 고민과 열정으로 창조적인 작업에 매달려왔던 흔적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사진적인 시각으로 순수하게 보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한국적 특수성을 사진에 담아낼 수 있을지, 여백의 개념을 많이 생각했죠. 남의 것을 답습하는 행위에서 벗어나 우리 것을 찾자는 의도였습니다.”
홍상현 작가의 시선은 언제나 위를 향해 있다. 건물과 창살 사이, 창살과 창살 사이, 건물과 건물 사이에 뚫린 공간이 바로 그가 바라보는 곳이다. 그는 거기에서 여백의 다양한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우리가 쉬 무시하고 지나칠만한 곳을 샅샅이 훑어내면서 보물 같은 작품을 만들어냈다. 그는 곳곳을 돌아다니며 찍을 장소를 물색한 뒤 적당한 양의 빛이 투과되는 시간을 기다린 다음, 별다른 조명 없이 노출을 조정하면서 한 장의 사진을 찍었다. 시간과 감각의 긴 싸움이었다. 하지만 이에 못지않은 복병도 만났다. 건물주와 경비들이 이상한 사진을 찍는 것은 아닌지 방해가 심했다.
“사진을 찍지 못하게 했습니다. 건물 보안문제일 수도 있지만 카메라를 들이대기가 힘들었죠.”
인화 과정도 순탄치 않았다. 사진이 디지털화되면서다. 그의 작품은 모두 암실에서 은염으로 뽑아낸 사진이다. 직접 보면 알겠지만 믿기 어려울 정도로 프린팅이 잘 돼 있다.
“프린트를 잘했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습니다. 은염사진에 대한 감사의 칭찬이었죠. 합성 아니냐, 디지털 아니냐는 소리도 들었습니다. 모두 고맙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점점 암실 작업이 어려워져 안타깝습니다. 암실 재료도 점점 없어지고요. 4 곱하기 5인치 필름도 6만 원 하던 것이 9만 원으로 올랐습니다.”
이러한 노력 끝에 탄생한 그의 작품은 도시문명의 중심에서 찾아낸 시공간적 아름다움이 가득하다. 사진의 영역을 넘어 회화적인 감성에 닿아 있다. 색을 빼고 빛의 정도만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것이 흑백사진이라는 그의 생각이 잘 전달된 작품인 듯싶었다.
그의 작품은 타이폴로지(typology:유형학) 같다는 말을 종종 들었다. 타이폴로지는 기계적이고 반복적인 사진 작업의 특성을 표현한 용어다. 작가의 감정이나 감성을 완전히 배제한 채 구체적인 유형을 반복해 작품을 만들어낸 것으로, 작업 당시에 작품을 구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진들을 하나로 모아야 힘을 갖게 되는 것을 말한다. 즉, 하나로는 정체성이 없지만 그것이 한데 모이면 가치를 부여받게 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작품을 ‘안티 타이폴로지’라고 말했다. “폭력적이고 정복자의 자세로 서구사회는 발전했지만 동양은 유연함과 강인함을 동시에 적용하면서 발전해왔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적 특수성을 담아낸 제 사진도 그렇습니다. 공백에 대처하는 다양한 방식을 보여주려고 한 것이지 타이폴로지는 아닙니다.”
그는 갖가지 구조물 사이로 보이는 여백을 나열한 것이 아니라 여백의 다양한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구조물을 역이용했다. 이런 점에서 그의 사진은 타이폴로지가 아니라 그 상태로 의미가 부여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과히 타이폴로지에 대한 색다른 반전이라 할만하다. 그는 계속해서 한국적 특수성을 반영해내는 작업에 매진할 계획이다. 그가 생각하는 한국적 특수성은 유헌식 비평가의 저서 ‘동시다발형 인간의 출현’에 영향을 받았다. 동시다발형이란 사회문화적인 각 요소들 중 한 요소가 압도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대등한 힘을 가지고 동시에 작동하고 있는 한국 사회만의 특성을 뜻한다. 그는 이러한 이론을 바탕으로 우리 민족이 학생이 아니라 선생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자신도 사진가로서 역할을 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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