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내가 만난 사람

김용우 소리꾼 - 음악도 마음도 트인 사람

이동권 2022. 9. 25. 20:42

김용우 소리꾼

 

김용우 소리꾼의 노래는 매우 섬세하고 새로웠다. 어렵고 따분하게 느껴졌던 전통국악과는 또 다른 감동을 경험하게 했다. 국악기와 서양악기 소리가 한 데 어울려 만들어내는 우리 가락은 ‘별로’이지 않을까라는 선입견을 무참하게 깨버렸다. 한편으로는 고독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사람들을 위로했다. 처져 있는 심사를 한껏 ‘업’시켜 주었으며, 깊고 절절한 선율로 뒤틀린 하루하루를 달랬다.


김용우 소리꾼의 팬들은 콘서트가 열리면 지방에서도 올라올 정도로 애정이 깊다. 하지만 새 앨범 소식이 반갑지만은 않다. 음반 판매가 쉽지 않은 까닭이다.

“음반 시장이 불황입니다. 더군다나 국악 앨범은 더 그렇습니다. 그나마 제 앨범은 나은 편입니다. 저를 아껴주는 팬들이 있거든요.  전에는 앨범을 제작사에서 만들었지만 지금은 제가 직접 만듭니다. 제작사에 커미션을 주지 않아도 되니까 더 괜찮은 것 같기도 합니다. 혼자 해도 별로 어려움은 없습니다.”

‘딴따라’라는 말이 심심치 않게 들릴 정도로 문화예술인에 대한 인식이 낮았던 때가 있었다. 요즘도 불쑥 튀어나오는 말이기도 하지만 1980년대 초반에는 더욱 심했다. 사람들은 거문고만 들고 다녀도 기생이 걸어간다면서 눈을 흘기곤 했다. 그 당시 음악을 무척 좋아했던 중학생 김용우는 사회의 불편한 시선에도 불구하고 국악 동아리에 들어가 피리를 배우면서 국악고 진학을 꿈꿨다. 난계예술제에서 상을 탔던 게 컸다.

“예술제에서 국악고에 다니는 선배님들을 만났어요. 학교 자랑을 하면서 국악고에 꼭 오라고 하더라고요. 그때 국악고에 진학하겠다고 결심했어요. 집에서는 전폭적으로 지지해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하고 싶은 일은 꼭 했고, 반대하면 더 하는 성격입니다. 아무도 막지 못했지요. 그런 저의 성격을 알고 있는 부모님께서는 집안 사정이 어려웠지만 피아노까지 사주셨습니다. 아버지 봉급의 10배 정도 했을 겁니다. 피리를 분 이유는 제가 사는 동네에 피리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피리는 입으로 부는 악기인데, 입이 닿는 부위에 ‘리드’라는 것을 끼워 붑니다. 새것을 살 형편이 안 돼 ‘리드’를 몇 번이나 깎아 사용하곤 했습니다.”

1986년 서울대 국악과에 진학한 그는 동아리 ‘메아리’ 활동을 시작하면서 세상을 배우기 시작했다.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있었습니다. 수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죠. 강의실까지 최루탄이 날아올 정도였거든요. 그때 책도 보고 세미나도 참여하면서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하며, 참되게 사는 게 무엇인지 깨닫게 됐습니다. 한 번은 농활 가서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부르는 소리를 들었는데 무척 마음이 끌렸습니다. 그래서 88년에 휴학하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소리를 채집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소리가 사라지는 것이 안타까워 자연스럽게 따라 부르게 됐고요. 똑같이 부르는 것이 아니라 민요의 아름다움이 최대한 잘 살게요.”

학교로 돌아온 그는 악장을 지낸 뒤 졸업 후 전통국악단 ‘슬기둥’에 들어가 장구잡이가 됐다. 사물놀이 故 김용배 선생에게 장구를 사사해 타악기에도 능했던 까닭이다. 그리고 ‘소리꾼’으로서 시작을 세상에 알렸다. 

“‘산도깨비 소금장수’라는 곡을 직접 부르게 됐습니다. 처음에는 못 부른다고 뺐는데 자연스럽게 손도 올라가게 되고 춤을 곁들이게 됐죠. 근데 이상하게도 피리 부르는 것보다 노래 부는 게 떨리지 않았습니다.”

이후 그는 ‘내 소리’, ‘내 음반’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으로 독자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김용우는 특별한 음악가로 통한다. 민요에 재즈, 클래식, 아카펠라 같은 현대음악을 접목해서 새로운 국악을 만들어낸 까닭이다. 이런 이유로 그는 보수적인 국악계 선생님들이나 선배들로부터 비판이나 지적을 받았을 만하다. 그러나 그는 “선생님들 중에서도 새로운 음악을 하고 싶다는 분들도 있다”며 웃어버린다.

“젊은 국악인 중에 전통을 잇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음악을 지켜나가는 데 꼭 필요한 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음악가들도 국악의 발전을 위해 가치가 있습니다. 어느 쪽이 옳다, 그르다 얘기할 수 없습니다. 서로 욕하면 안 됩니다. 서로의 가치를 인정해야 합니다. 퓨전음악을 하는 국악인들은 반반입니다. 예전에 음악을 하면 악단에 들어가거나 교육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그런 자리를 찾기 힘듭니다. 그래서 다른 음악 양식을 찾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새로운 시도 자체가 재미있었습니다. 퓨전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지요. 하지만 중요한 것은 ‘퓨전’이 아닙니다. 노래를 잘 표현하기 위해서 꼭 퓨전일 필요는 없습니다. 사람들이 좋아한다고 해서 퓨전을 한다거나 경험 없이 마구잡이로 섞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서양음악을 국악에 접목시킬 때 서양음악을 제대로 알아야만 가능합니다. 그렇지 못한 팀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의 음악이 사람의 마음을 더욱 매료시키는 이유는 ‘독창성’보다 ‘음악성’에서 찾을 수 있다. 그의 음악은 ‘형식’이 아니라 ‘감각’에서 진정한 멋을 발현한다. 심정적인 부분은 특히 그렇다. 그의 노래는 청정하고 편안한 기분에 젖게 한다. 심사가 삐딱하게 꼬부라지고 돋쳐 있는 일상을 누그러뜨리도록 돕는다. 음악을 잘 모르는 일반인으로서 나는 이런 점을 김용우 노래의 가장 큰 특징으로 꼽고 싶다.

 

국악은 아직도 어렵고 무겁다. 마니아들에 의해서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정도로 대중화의 길은 멀어만 보인다. 국악은 우리의 정신이자 삶이었지만 국악의 발전에 회의적인 사람이 많다. 요즘 시대와 맞지 않는 면이 있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달랐다. 시대가 변했다고 해서 국악이 더 이상 맞지 않는 것은 잘못됐다는 판단이다.

“국악은 어렵습니다. 좀 더 쉽게 만들려고 노력하지만 쉽지 않은 음악입니다. 음악의 맛을 깊게 하기 위해 힘든 점도 있습니다. 하지만 국악에는 우리의 역사가 농축돼 있습니다. 통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잘못됐다고 봅니다.”

김용우는 공연할 때 필요에 따라 가사를 바꾼다. 같은 민요가락이지만 무대의 성격에 따라 개사를 하며, 그럴 경우에는 더 잘하는 사람에게 맡기는 편이다. 그는 또 임진강이나 비무장지대 같은 노래도 좋아하며, 사회성 짙은 음악에 대해서도 반감은 없다. 뜻이 통하고, 김용우를 팔아서 도움이 된다 해도 상관하지 않는다. 자신이 쓸모 있게 쓰일 수 있다면 모두 받아들일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의 일상도 트여 있다. 그는 겉모습에서 국악인의 모습을 찾기 힘들다. 생활한복과 고무신은 아니더라도 뭔가 남다른 분위기가 있을 것 같지만 그는 세련된 일반인의 모습 그대로다.

“국악 한다고 티내지 않으려고 합니다. 깔끔하고 예쁘면 됩니다. 굳이 생활한복을 입고 다닐 필요도 없습니다. 최대한 무대에서도 즐거움을 주고 싶습니다. 외모도 그렇고요.”

그의 목소리는 미성이다. 걸걸하고 툭 터진 음성이 아니다. 대중가요에도 잘 맞을 듯싶다. 그러나 국악 중에서 판소리만이 걸걸한 목소리를 선호한다. 정가, 가곡, 가사 등 판소리를 제외한 모든 소리에는 미성이 제격이다. 이런 점에서 그의 목소리만큼은 국악인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