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례로 익사시키기'를 본 후 나는 쉽게 잠들 수 없었다. 도시 골목을 종단하는 스산한 바람이 음산한 소리로 나뭇가지를 흔들며 쓸데없는 공상을 부채질하는 것 같았다. 나는 긴 흰털을 휘날리는 여우들에게 쫓겨 허겁지겁 도망가는 공상에 빠지는 것 같았고, 머릿속이 미세한 장막 안에 갇혀 질식당하는 공포도 느꼈다. 너무도 차갑고 냉정한 피터 그러너웨이 식의 지적 유희에 질식할 것 같았다.
사람마다 해석은 천차만별이다. 1부터 100까지 숫자를 숨겨 놓고 보여주면서 남자를 죽이는 무의미한 게임에 동의할 수 없는 사람도 있고, 일반적인 극영화와 다른 구성, 화면, 스토리 전개가 무지 지루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감독이 아무 생각 없는 것 같다는 사람도 있고, 여태까지 본 영화와 다른 색다른 카타르시스를 준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차례로 익사시키기'는 나에게 묘한 충격을 주었다. 차례로 익사하는 남자들, 그들은 여자들에게 모두 죽는다. 씨씨 콜핏이라는 이름을 가진 모녀 삼대. 노년 씨씨는 술에 취해 다른 여자와 함께 욕조에 있던 남편을 익사시키고, 중년 씨씨는 자신에게 무관심한 남편을 바다에 익사시킨다. 임신 중인 청년 씨씨는 아이만 필요하다며 남자친구를 수영장에 익사시킨다. 그들은 폭력과 성에 탐닉하고, 타인을 불행에 빠지게 할 정도로 이기적이며, 상대방의 상처에 귀 기울이지 못하는 무책임한 남성을 대표해 죽임을 당한다. 그러나 이 살인의 끝은 소음도, 저항도, 나르시스도 아니다. 결국 타나토스(자살본능)로 남자들을 이끈다. 죽임을 당하면서도 스스로 자멸한다. 세 모녀는 검사 마제트를 통해 살인을 사고로 조작하고, 마지막 살인에 나서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다.
영화에서의 물은 보통 신묘하거나 불규칙한 구조를 형상화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영화도 그런 듯싶다. 남성에게 죽음을 주는 물, 여성에게 새로운 삶을 주는 물, 그것은 양분될 수 없는 물의 속성 안에서 완벽한 갈라섬의 도구가 된다. 아이러니하다.
영화에서 여자 주인공 씨씨들은 일종의 천사다. 아름다운 천사가 아니라, 타락한 천사다. 씨씨는 또 다른 씨씨를 낳기 위해 혐오의 대상인 남성의 씨앗을 받아 잉태했을 테지만 그들을 죽인다. 아들을 낳는 것은 형벌이고 딸을 낳으면 보상이 되는 것처럼 여자들은 남자들을 죽인다. 이 또한 아이러니하다.
이 영화는 세상을 페즐게임처럼 풀어낸다. 게임처럼 이기고 지는 것, 진보하고 퇴보하는 것, 뭐든 승자와 패자의 논리로 마지막에 다다른다. 그러나 인생에는 승자와 패자가 없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얼마나 아름답고 진지하게 삶을 대했는지에 가치가 있다. 인간답지 못하고, 아름답지 못한 것은 진보가 아니라 폭력의 메커니즘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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