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놓으면 모든 일이 수월하다.
구리동 해수욕장에 도착했다. 파도는 눈보라가 요동치는 겨울들판처럼 요란하게 철썩거리고 있었다. 모가 난 돌멩이들을 둥글게 만들면서 평생을 살아왔을 파도를 생각하니 울컥했다. 나는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파도가 해왔던 것처럼 뭔가를 실컷 해본 적이 있었을까?
나는 사랑마저도 평생 제대로 하지 못할까 봐 오들오들 떨었다. 그러나 내 사랑은 내 만족으로 끝나버리곤 했다. 내 결점을 인정하지 않았고, 상대방이 싫어하더라도 고집처럼 내 사랑법을 관철시키려고 했다. 그로 인해 서로에게 피로를 줬다. 단물이 빠져버리면 서로 상처를 남긴 채 헤어지기 마련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고쳐지지 않았다. 행동 하나하나 조금 더 깊게 생각하고 상대가 원하는 것을 주는 사람이 되지 못했다.
사랑이 아니어도 됐다. 늙어서 삶을 후회하지 않도록 무엇 하나라도 진탕 해보고 싶었다. 마음껏 망가지고도 싶었다. 속심에 끌리거나 타락에 흠뻑 빠져 보고도 싶었다. 어차피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마음부터 움직이지 않았다. 배짱도, 공명심도 없었다.
나이가 드니 철이 들었다. 사랑 타령은 버렸다. 그저 담백하게 살고 싶었다. 작은 것에 연연하지 않고 마음을 가볍게 하고 싶을 뿐이었다. 앞으로도 내가 가진 모든 것을 해체하면서 장난기 가득한 마음으로 마지막 날을 기다리며 세상에 머물고 싶다.
구리동 해수욕장은 군사시설이기 때문에 일출 후부터 일몰 전까지만 이용할 수 있었다. 교통수단은 따로 없었다. 도보로 40분 정도를 꼬박 걸어야 했다. 트래킹을 즐기는 기분이면 좋겠지만 아이들이나 몸이 불편한 사람들과 함께 이동할 때는 주민이나 민박집주인에게 부탁해야 한다.1)
해변은 자갈로 이뤄져 있었다. 썰물 때가 되면 그 아래로 모래사장이 나왔다. 휴가철에도 사람이 많지 않아 편안하게 한나절을 보낼 수 있었지만 해수욕장 바로 옆에 군사시설과 군부대가 있어 포근하거나 유유자적한 즐거움은 없었다. 아예 마음을 놓는다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해수욕장은 완만하고 수심이 낮았지만, 서해의 다른 해수욕장과 달리 썰물 때도 갯벌이 보이지 않을 만큼 모래사장의 폭이 넓고 바위가 많았다. 서해지만 남해와 같은 느낌이었다.
풍성한 바다 어장은 갯바위낚시와 바다낚시를 만끽하러 온 어공들의 정열을 쏙 빼놓기 충분했다. 낚싯대 둘러 던져 놓고 아릿한 음악을 들으면서 바위에 앉아 있으면, 바다라는 것이 얼마나 복되고 아름다운 것인지, 천금 보화와도 바꿀 수 없는 것인지 알게 될 것이다.
1) 구리동 해수욕장은 사람이 많지 않았다. 사람으로 붐비고, 여기저기를 관광지로 개발해 흉물스럽게 변한 바다와는 완전히 달랐다. 나는 그곳에 낮잠처럼 달콤하고 감미로운 흔적을 남기고 돌아왔다. 일광욕이나 모래찜질을 하지도 않았는데 피부가 가무잡잡하게 그을렸다. 여름 여행의 좋은 점이다. 해수욕장에 누워 있으니 기분이 좋아졌다. 왠지 육감적인 남자가 된 것 같았다.
나는 세 번 직장을 옮겼다. 매번 직장을 옮기거나 직종을 바꾸는 일은 쉽지 않았다. 안정된 생활에서 쉽게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았다. 삶의 의미를 그저 돈 버는 것에서 만족하고 포기하곤 했다. 여행을 하면서부터 나는 인생을 예열하기 시작했다. 머릿속에 요령이나 수완이 아니라 삶에 대한 열정과 환희를 채웠다. 내 문제와 딜레마를 스스로 인지하면서 나의 정체성을 지키는 것, 인간으로서의 책임을 게을리하지 않는 것을 가슴에 새겼다. 그러자 이직은 굉장히 수월했고 좋은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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