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미군의 민간인학살사건

⑧영동 매천리 민간인학살사건 - 우리 마을은 ‘불꽃밭’이었다

이동권 2023. 6. 9. 11:30

노인회관에 모인 매천리민간인학살사건의 생존자와 마을주민들. 제일 오른쪽이 임복희 씨, 제일 왼쪽이 차상만 씨.


충북 영동군 영동읍 매천리. 마을 입구에 조성된 작은 꽃밭에 이름 모를 꽃들이 만발했다. 울타리 옆에는 올망졸망한 토마토들이 여기저기에서 불에 타는 듯 익어갔고, 가벼운 바람에도 가녀린 줄기를 흔들어대는 코스모스가 진분홍빛 꽃잎을 벌써부터 늘어뜨렸다. 참으로 조용하고 평온한 마을이다.

한때 이 마을은 한국전쟁 중 미군의 무차별 폭격과 기총소사로 완전히 전소됐다. 마을(매끄네)에 있던 주민 60여 명은 외마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절명했고, 마을 뒤편 ‘밴디골’에서도 주민 7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일제강점기에 혹독한 강제노역에 동원돼 손톱이 빠지도록 일하면서도 마을을 지켜왔던 순박한 주민들에게 있어서는 안 될 혹독한 시련이었다.

미군의 폭격으로 시어머니와 아들, 딸을 잃은 임복희 씨는 복숭아와 고구마를 정성스레 권하면서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오랫동안 태운 담배가 가슴을 짓누르며 잔기침을 부른 탓이다. 늙고 병들어 이젠 아주 몸을 쓰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지만 여전히 담배를 끊지 못하고 다시 피워 문다.

“그 무렵에 담배를 배웠어. 이젠 눈물도 나오지 않아. 하도 울어서. 전쟁 때문에 억울하게 죽었다고 생각했지. 누가 했는지도 모르고 지금까지 살아왔어. 그 시절은 생각만 해도 징그러워.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몰라.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돼.”

임 씨는 마른 눈물이 느껴져서인지 여윈 손으로 눈을 비볐다. 그저 스쳐가는 일로 여기며 살고 싶었던 세월이었으리라. 그때 그 순간에 대한 기억이 내 것이 아니길 바라는 그의 마음이 느껴져 못내 미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마을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용두산 기슭에 빽빽이 들어선 소나무 가지들이 연푸른 하늘을 향해 곧게 뻗었다. 이날의 슬픔이 하늘 끝까지 이어지기라도 하는 듯이.

미군 폭격에 피바다, 불꽃밭이 된 마을

1950년 9월 2일.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한 초가을이었다. 투명한 햇살과 뒷산 그루터기에서 풍기는 감미로운 냄새가 유난히 잘 어울리는 그런 날이었다. 주민들은 이날도 어김없이 소에게 여물을 먹이고, 아직 거둬들이지 않은 감자를 수확하러 밭에 나갔다. 아침부터 멀리서 포탄소리가 들려왔지만 평범한 농촌마을의 일상은 변함없었다. 당시 이곳에는 100여 가구에 300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다.

오후 2시경 인민군 1개 여단이 미군과 전투를 마치고 마을로 들어왔다. 오랜 전쟁으로 피곤에 지친 이들은 주민들과 인사한 뒤 곧바로 잠을 청하러 밴디골(마을 뒤편)에 있는 굴로 들어갔다.

이 굴은 일제강점기에 태평양전쟁을 도발한 일본군이 난공불락의 탄약 저장고로 사용하기 위해 만든 곳이다. 굴에 직접 가보면 대부분 바위를 뚫고 파놓은 데다 구덩이의 크기가 집채보다 넓은 곳도 있어 입이 딱 벌어진다. 마을주민 차상만 씨의 말이다.

“굴이 103개야. 매천리 주민들은 전쟁 때도 피란 안 가고 이 굴에서 살았지. 보통 굴 하나에 한두 가구, 큰 굴에는 서너 가구도 들어갔어.”

이튿날 오전 인민군은 마을에 내려와 회의를 하자고 남자들을 굴로 불러들였다. 인민군이 퇴각하면서 벌어지게 될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회의에는 마을의 몇몇 젊은 여자들도 함께 따라나섰다.


오후 1시. 맑고 짙푸른 하늘 위로 미군의 폭격기(B-19기로 추정) 5대가 편대를 지어 나타났다. 윙윙 프로펠러 소리를 내며 바람을 가르던 전투기는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여자, 노인, 아이들만 남아있는 마을에 폭탄 100여 개를 촘촘히 퍼붓기 시작했다. 작렬하는 소리와 함께 마을은 순식간에 불바다가 됐다. 마치 기름을 붓고 불을 붙인 것처럼 마을은 화염에 휩싸이면서 파괴됐다. 하늘도 검은 연기와 화약으로 덮여 초저녁처럼 어두웠다.

폭격으로 마을은 아비규환의 생지옥이었다. 폭탄이 떨어진 곳의 주민들은 귀청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파편에 갈기갈기 찢겼고, 무너진 가옥에 묻히거나 불에 타 숨졌다.

임복희 씨의 시어머니와 딸 김순자(당시 7세), 아들 김성호(당시 4세)도 그 자리에서 숨졌다. 폭격으로 집에 불이 났지만 빠져나오지 못하고 즉사했으며, 시신은 불에 탔다.

차영환 씨의 어머니도 폭격으로 불에 타 죽었다. 임복희 씨는 “우리 뒷집에 살았는데 시체의 등허리가 다 익어 있었다”면서 “폭격 소리를 듣고 감자 가마니에 숨어 있다 당한 일”이라고 증언했다.


배가 남산만 한 임산부였던 정팔문 씨의 아내도 폭격으로 불에 타 숨졌다. 그의 아들도, 등뼈가 굽어 큰 혹 같은 것이 불쑥 나와 있던 꼽추 여동생도 죽었다.

장윤섭 씨의 여동생 장애순 씨는 얼굴만 빼고 목에서부터 발끝까지 모두 타서 죽었다. 시집간 뒤 친정에 잠시 놀러 왔다 변을 당했다.

저공비행으로 주민들 향해 기총소사

한바탕 폭격이 끝났다. 폭음소리에 놀란 주민들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집밖으로 나왔다. 부모가 자식을 안거나 늙은 부모를 자식이 업고, 형제자매가 손을 잡고 검은 연기 틈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부상을 당한 주민들은 빠져나오지 못하고 불에 타 숨졌다.

집에서 나온 주민들은 마을 뒷산에 있는 굴을 향해 필사적으로 뛰었다. 얼마나 빨리 뛰었는지 얼굴에 경련이 일어나고, 입안이 다 말랐으며, 관자놀이가 아팠다.

폭탄을 떨어뜨리고 우회한 폭격기들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저공비행을 하며 주민들을 향해 기관총을 난사했다. 사람, 가축 할 것 없이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명체를 죽였다. 그러나 마을에는 전투기의 기관총으로부터 몸을 가려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천운에 맡겨질 뿐이었다. 주민들은 몸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채로 바닥에 쓰러졌다.

이해근 씨의 부인은 총탄이 배에 박혀 썩어 들어갔다. 다리는 골절 돼 피가 철철 쏟아졌다. 차상만 씨는 “폭격이 끝나고 마을로 내려온 인민군들이 이 씨 부인을 데려가 홀딱 벗겨서 치료한 다음 집으로 돌려보냈다”면서 “이날 폭격으로 평생 병신이 됐다”고 말했다.

이 씨의 부인은 폭격으로 다리를 절뚝거리는 장애인이 됐다. 불편한 다리를 볼 때마다 죽음과 맞닥뜨리는 전율을 느끼며 평생 치를 떨어야 했다.

폭격에서 살아남은 주민들은 폭격기가 사라지자 망연자실한 얼굴로 주저앉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떤 이들은 핏기 없는 입술을 부들부들 떨며 가족의 시신을 부둥켜안고 울부짖었고, 총탄이 몸속에 파고들어 피투성이가 된 채 허우적거리면서도 가족을 찾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일어서다 쓰러졌다.

밭을 매러 간 임복희 씨도 밭이랑에 엎드려 숨어 있다가 전투기 소리가 잠잠해지자 마을로 달려갔다. 무너져버린 가옥과 불에 탄 주민들을 보면서 넋을 잃고 그 자리에서 눈물을 뚝뚝 흘렸다. 손자, 손녀의 손을 잡은 채 공포에 질린 얼굴로 죽어 있는 시어머니를 보면서 다리가 떨려 움직일 수 없었다.

폭격 이전에도 미군이 주민에게 총격

굴에 갔던 주민들은 마을에 불이 나자 반쯤 미친 얼굴로 소리를 지르며 달려 내려왔다. 이들은 폐허로 변한 마을을 바라보면서 한참 동안 피눈물을 쏟아냈다.

사람들은 불에 타고 있었다. 가는 곳마다 불에 탄 시체가 굴러다녔다. 얼굴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타버렸지만 살이 타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죽어간 모습이었다. 피가 쏟아진 곳에는 어디에선가 날아든 파리들이 몰려들었다. 눈을 감고 싶을 정도로 비참한 광경이었다.

가옥도 온전한 것이 없었다. 번개에 맞아 불에 탄 들판 같았다. 주민들은 타다 남은 살림살이라도 건지기 위해 하루 종일 샘물을 퍼다 나르며 불을 껐다. 그리고 곧바로 시신 수습에 들어갔다. 시신은 팔다리가 끊어지고, 옷과 피부가 모두 타서 흙으로 만든 인형 같았다. 주민들은 처참하게 훼손된 시신을 거적에 말아 옮겨 묻으면서 오열하고 또 오열했다.

폭격은 일순간에 아주 작은 인간의 존엄성마저 철저하게 파괴했다. 마을이 쑥대밭이 된 뒤 주민들은 당장 먹을 게 없었다.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먹을거리를 찾아야 했다.

임복희 씨의 말이다.

“먹을 게 없었어. 불에 탄 곡식도 먹고, 먹을 수 있는 건 다 캐서 먹었지. 사는 게 아니었어. 지금처럼 팬티가 어디 있어. 시아버지도 발가벗겨놓고 옷을 빨아 입힐 정도였는데. 여기저기에 밥 얻어먹으러 다니는 사람이 많았어.”

폭격 이후 이 마을에 사는 30여 가구가 같은 날 제사를 지내고 있다.

공포의 순간을 잊고 운명이라 생각하며 참고 견디며 살아온 58년. 매천리 주민들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임복희 씨의 말에서 주민들의 마지막 바람을 읽는다.

“노근리나 매천리나 다 똑같아. 노근리랑 다 똑같이 해야 해. 노근리 다음으로 피해자가 많은 곳이 여기야. 여기.”

한편 폭격 이전에도 미군의 무자비한 학살이 있었다. 이 마을에 사는 손학택씨의 아버지가 미군의 총에 맞아 숨졌다. 차상만 씨는 “굴로 피란 간다고 가마솥을 어깨에 둘러메고 산으로 올라가는데 미군이 총을 쐈다”고 주장했다. 참으로 증오스럽고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만행이다.

미군, 학살에 대한 사과와 배상 책임져야

매천리는 미군의 잔인한 학살이 자행됐던 노근리에서 약16km 떨어진 농촌 마을이다. 미군은 한국전쟁 중에 인민군의 퇴각로였던 이곳에 인민군,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폭격을 가했다. 이 과정에서 매천리 주민들의 희생이 있었다.

현재 살아있는 생존자들은 많지 않다.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하나둘씩 삶을 마감하고 있다. 폭격으로 가족 6명을 잃은 남언년 씨도 당시 병원에 입원해 있어서 만날 수 없었다.

노근리는 특별법 시행으로 사건 전모에 대한 진실이 밝혀졌고 사후대책도 마련됐다. 하지만 매천리는 아니다. 노근리와 같은 범주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지만 아직 진실규명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러한 점은 전국적으로 똑같다. 한국 전쟁 당시 민간인 희생자는 100만여 명, 영동에서만 400~500명 정도로 추정되고 있지만 진상규명도, 유해발굴도, 사후대책도 지지부진하기만 하다. 진실화해위는 얼마 전 매천리민간인학살에 대한 진상조사를 시작했다. 지금까지 20여 명의 피해자가 확인된 상태다.

 

 

한국전쟁 중 미군의 민간인학살이 자행됐던 매천리 마을의 현재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