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미군의 민간인학살사건

⑩ 1945년 8월 15일 만세 외치지 못한 조선인, 그리고 미군이 들어왔다

이동권 2024. 8. 31. 14:24

조선의 독립을 기뻐하는 사람들

 

1945년 8월 15일. 조선인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만세를 외치지 못했다. 해방의 기쁨에 거리마다 만세소리가 울려 퍼지고 태극기가 물결쳤을 것으로 알고 있지만 전혀 사실이 아니다.

그날 거리에는 아무도 나오지 못했다. 일본 경찰들은 그대로 있었고, 순사 완장을 찬 조선인, 일제에 협력한 공무원, 친일 예술인, 독립운동가, 조선인, 전쟁포로, 징병피해자, 위안부 등 사람들은 각자 다른 삶의 위치에서 광복을 맞이했다. 그래서 일본의 패망은 누군가에겐 느닷없는 사건이었고, 또 누군가에겐 눈물이 앞을 가리는 감격이었다.

1945년 조선이 독립될 당시 경성방송국 취재기자로 일했던 문제안 씨는 <KBS> 광복절 특별 방송에서 인터뷰했다. 문 씨는 1945년 9월 9일 제1방송을 한국어 방송 채널로 바꾸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광복 이후 미군정과의 의견대립으로 방송사를 그만두고 신문기자로 일했다.

문제안 씨는 8월 11일 총독부 신문방송계 무료바야시 계장이 총독부 출입기자들을 오전 10시쯤 모두 불러놓고 일본 천황의 항복을 미리 암시했지만, 자신은 반신반의했다고 말한다.

“무료바야시 계장이 풀 죽은 목소리로 ‘일본의 조선에 대한 정책이 밑바탕부터 달라질 거다’라고 말하는 거예요. 일본 기자들에게 미리 철수준비를 하라는 뜻으로 말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까지의 점령정책과 총독정책이 변경된다’ 다시 말해서 ‘조선을 포기한다’는 말이겠지요. 미리 짐작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정작 듣는 그 순간에는 ‘이제 총독부도 끝났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전기충격이라도 받은 것 같아 몸이 부르르 떨리더군요.”

하지만 문 씨는 이 사실을 밖에서 얘기하지 못했다. 방송국에 돌아와서도 선배들에게 일본이 패망하는 거 아니냐고 물어보는 척을 했을 정도다. 말조심을 하지 않으면 일본인들에게 끌려갈까 싶어 몸을 사렸다. 그래서 가까운 지인들에게도 15일까지 말을 하지 못했다.

“말을 못 했던 만큼 속으로는 반가운 것인지 어떤지 떨리기만 했어요. 정말 독립이 될까? 그러나 갑자기 ‘해방’을 생각하니 앞이 깜깜해지는 것 같았어요.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속으로만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혼자 두 손을 높이 들어 부르르 떨기도 했어요.”

일본 천황의 항복방송 내용은 15일 정오에 방송됐다. 하지만 동경에서 들어오는 전파 상태가 좋지 않아 방송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문 씨는 라디오 수신기마저도 귀한 시절이었으니, 들은 사람보다 안 들은 사람이 더 많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15일에 해방 사실을 안 사람은 몇 명 안 됩니다. 요즘에 와서는 가끔 정치하는 사람들이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방송에 나와서, 마치 제 눈으로 보기라도 한 것처럼 ‘8월 15일 서울 거리에는 만세소리가 울려 퍼지고 태극기가 물결치듯 휘날렸다’고 떠벌리지만 다 거짓말입니다. 그날 서울 큰 거리에는 아무도 없었어요.”

해방을 축하하는 최초의 독립만세는 독립운동가인 안재홍 선생의 집에서 터져 나왔다. 안 선성은 아래층 큰방에 보성전문, 연희전문, 중앙 불교전문, 경성제대 학생들까지 40명 모아놓고 열변을 토했다. 당시 기자였던 문 씨는 뭔가 중요한 일이 벌어질 것 같아 안 선생의 집에 찾아갔다.

“계단에 웅크리고 앉아서 열심히 들었어요. 얘기를 다 마치자 누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모두 벌떡 일어나 두 손을 높이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쳤어요. 내 눈에 뜨거운 눈물이 솟구치는 것 같았어요. 그게 한 4시 반쯤 됐을 거예요. 사실 그것이 최초의 독립만세였을 겁니다.”

이날 저녁 서대문형무소 구치감에 갇힌 60여 명의 투사들이 풀려났다. 그 사람들은 형무소 앞에서 독립만세를 불렀는데, 문 씨는 그것이 두 번째 독립만세라고 기억한다.

“사람들이 독립이 되었다는 사실, 일본이 망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한 건 그날 밤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때는 일본 천황의 방송이 몇 번 되풀이되었지요. 우리말로도 방송하고 해설도 해주었어요. 그렇게 하니까 16일 나라 전체가 발칵 뒤집혔어요. 정말 서울 시내, 누가 나오라고 한 것도 아닌데, 전부 길거리로 나왔어요. 그리고 제대로 된 태극기는 아니지만 어떻게 그리도 급히 만들었는지 형형색색의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불렀어요.”

이러한 사실은 당시 울산 성동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던 정재도 씨에게서도 확인된다. 정 씨는 8월 15일 당일 늦게나마 일본항복소식이 들려오기는 했지만 긴가민가했다. 그가 해방 소식을 제대로 듣게 된 건 바로 16일이다.

“동네 사람들이 모두 나와서 만세를 불렀죠. 첫날에는 못했어요. 일본 경찰들이 그대로 다 있는 데 어떻게 하겠어요. 해방이 되니까 다른 선생님들은 다들 고향으로 돌아가더라고요. 지금 나라가 바뀌었는데 무슨 놈의 학교예요. 일본 사람들은 일본 사람들대로 부산으로 가버리고, 한국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대로 고향으로 돌아가는 거죠. 그러고 나니까 학교가 텅 비었어요.”

해방의 기쁨도 잠시, 다시 방송국은 일본군에 점령당한다. 17일 방송국에 출근한 문 씨는 참담한 경험을 했다.

“방송국에 일본 군대가 쫙 깔렸어요. 들어가려는데 막기까지 했어요. 얘기를 들어보니까 경성일보, 매일신보에 들른 군인들이 10시 조금 지나 방송국에 몰려와서는 조선군사령부의 나가야 보도부장의 명령이라면서 이렇게 말했다는 겁니다. ‘방송국은 이 시간부터 일본군이 점령한다. 점령한 곳의 주민은 포로나 마찬가지의 처분을 받는 게 통상적이다. 그러나 여기 직원들은 점잖으니까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겠다. 그러나 그렇다는 사실은 분명히 알아둬라.’ 한마디로 일본군 아래서 꼼짝 말라는 얘기였어요. 그리고 장총에 대검을 꽂고 스튜디오는 물론 보도과와 경리과 할 것 없이 군인을 배치하는 거예요.”

이런 상태는 9월 9일 미군이 서울로 들어올 때까지 계속됐다. 해방이 됐지만 방송국은 애국가 한 번 틀지 못했고, 시간을 때우는 음악 같은 것만 계속 내보냈다.

“9월 8일 밤, 헤이워드라는 미국 중령이 와서 서투른 일본말로 말했어요. ‘이제부터 내가 방송국에서 제일 높은 사람이다. 내 말을 들어라.’ 인천에 상륙해서 선발대로 들어온 미군이었어요. 그래서 제일 먼저 온 곳이 서울에서는 방송국이었던 거예요. 그리고 일본군에게 통고하고 다음날 9월 9일 아침 8시 경비하던 일본군과 미국 병사들이 교대했어요.”

1948년 9월 8일 미군 선발대가 인천항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이었다.

 

이날 이후부터 역사의 긴 수렁은 조선인의 삶을 무던히도 엇갈리게 만들었다. 세월은 어떠한 평가나 청산 없이 흘렀다. 친일파 후손의 재산이 문제가 될 때마다 격분을 불렀고, 좌우의 대립에 부화뇌동해 해방공간의 역사를 단순한 이분법으로 재단하고 말았다.

 

①권평근·이석우 피살사건 - 미군은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