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미공원 입구에는 공사판에서 주워온 문짝들과 베니어합판을 붙여 만든 허름한 판잣집이 있었다. 그 앞에는 군데군데 낡고 삭은 플래카드 여러 개가 어지럽게 걸려 있었다. 미군의 무자비한 학살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월미도 원주민들과 이들의 후손들이 투쟁하는 월미도원주민귀향대책위원회 사무실이었다.
이들은 미군에 이어 한국 정부가 몰수해 버린 고향을 되찾기 위해 사투를 벌였다. 월미도 원주민들은 한국전쟁 이후 미군이 주둔하고 해군기지가 들어서면서 고향에 가지 못했다. 2001년에는 인천시가 월미도를 매입해 월미공원을 조성해 버렸다.
인천광역시 중구 북성동 1가에는 우묵하게 솟아오는 언덕배기 밑으로 ‘월미공원’이 조성돼 있다. 따사로운 햇살이 늘어지는 긴 대로 끝에 서서 이 공원을 바라보면 바다를 사이에 두고 두터운 부채모양처럼 펼쳐져 있어, 지금은 육지지만 예전에는 ‘섬’이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이 공원에는 주말이 되면 지역 주민들과 연인들로 북적인다. 촘촘하게 조성된 산책로는 경관이 수수하고 평온해 즐거운 한때를 즐기려는 사람들로 끊이질 않는다. 하지만 이곳에서 미군의 ‘월미도원주민학살’이 벌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찾는 이는 드물다. 공원 내 조성돼 있는 조형물에도 옛 월미도의 평화로운 풍경만이 전시돼 있을 뿐, 이 참혹한 살육의 현장은 미군의 신화에 묻혀 역사 속에서 자취를 감춰버렸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은 월미도 원주민 거주 지역에 95발의 네이팜탄을 떨어뜨리고 기관총을 난사했다. 이 폭격으로 월미도의 건물과 숲, 원주민 거주지가 완전히 파괴됐다. 목숨을 잃은 민간인 희생자만 1백여 명에 이른다.
살아 움직이는 것 모두 죽인 미군, 인천상륙작전의 또다른 진실
1950년 9월 10일. 하늘은 아주 맑고, 바다는 파랗게 반짝이는 초가을 새벽이었다. 곤한 잠에 빠져 있던 주민들은 어딘가에서 귀청을 때리는 굉음에 놀라 잠에서 깼다. 동사무소 인근에 떨어진 네이팜탄이 몇몇 주민들의 사지를 찢어놓은 순간이었다.
정용구(당시 35세) 씨 집 위로 두 번째 폭탄이 떨어졌다. 그 자리에서 정 씨는 숨을 거뒀다. 이 폭격으로 마을은 산산이 부서졌고, 삽시간에 불바다가 됐다. 거동이 불편하거나 부상당한 주민들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불에 타 숨졌다.
폭탄 소리에 놀란 주민들은 속옷 바람으로 뛰쳐나와 아이를 업고 달리기 시작했다. 파편이 몸에 박힌 사람들도 아픈 줄 모르고 도망쳤다. 하지만 전폭기는 저공비행을 하며 주민들을 향해 무차별 기총사격을 가했다. 육안으로도 민간인이라는 것을 식별할 수 있었지만 총탄은 멈추지 않고 주민들의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심지어 어린아이들의 깨끗한 얼굴에도, 순진한 처녀의 가슴에도 날카로운 총탄이 날아와 박혔고, 신음소리를 내며 몸을 움직이는 사람들도 모두 쏴 죽였다. 야만이었다.
임인자(당시 15세)씨의 작은 아버지는 사촌여동생을 오른팔로 안고, 할머니를 왼손으로 잡고 나왔는데, 몇 발의 총탄이 그의 오른쪽 허벅지 옆을 스쳐 지나갔다. 만약 두 사람의 위치가 바뀌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야말로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급박한 상황이었다.
이 폭격으로 수많은 주민들이 생명을 잃었다. 어떤 이는 머리가 깨지고, 어떤 이는 복부에 구멍이 났다. 한인덕 씨는 “머리가 터져 하얀 것이 흘러내리던 한 청년이 그것도 모르고 살기 위해 달려가다 얼마 못 가 푹 쓰러졌다”며 몸서리쳤다.
월미도에는 인천을 잇는 다리가 놓여 있었다. 자동차와 사람들이 함께 지나갈 수 있는 3m 폭의 다리였다. 이 다리 오른쪽에는 월미도 원주민 80~90가구가 거주하고 있었다. 이곳에는 해수탕, 수영장을 비롯해 각종 위락시설이 조성돼 있었는데, 서울 사람들이 휴양을 올만큼 국내에서 손꼽히는 관광지였다.
다리 왼쪽에는 갯벌이 있었다. 미군의 폭격 당시 간조 때여서 물이 빠진 상태였다. 폭격을 피해 도망 나온 주민들은 갯벌로 몸을 숨겼다. 가파른 언덕 위, 작은 숲 속에 몸을 숨긴 사람들도 탄환이 계속 날아오자 갯벌로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주민들은 갯벌에 닿기도 전에 마을길에서, 다리 인근에서 미군의 총탄에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져갔다.
갯벌에 도착한 주민들은 개흙을 서로 몸에 발라주고 몸을 바짝 엎드렸다. 카멜레온이 천적으로부터 자신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 색을 바꾸듯이 벌거벗은 몸에 개흙을 발랐다. 그러나 이곳에도 전폭기의 기총소사는 계속됐다. 갯벌을 뒤덮은 소금 거품이 이내 피로 뒤범벅이 됐다.
곧이어 2차, 3차 폭격이 이어졌다. 이 폭격으로 1차 폭격에서 폭파되지 않은 건물 서너 채까지 차례로 무너졌다. 바다 밑으로 가라앉은 왕국처럼 그렇게 월미도 원주민 마을은 땅속으로 완전하게 꺼져버렸다.
마을 가장자리에 살고 있던 전천봉 씨는 아버지와 함께 갯벌에 숨어 살아남았다. 당시 17세였던 그는 “그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며 기자의 취재 수첩에 비행기와 네이팜탄이 어떻게 생겼는지 직접 그려주기도 했다.
“비행기 한 대에 네이팜탄 2발이 실려 있었는데, 비행기가 북쪽으로 날아가다 선회하더니 마을 한가운데에 폭탄을 떨어뜨렸어요.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빠져나올 수 없었지요. 순식간에 불바다가 됐거든요. 마을 가장자리에 살던 주민들이 놀라 도망치자 비행기가 기관총을 쐈어요. 진짜 참혹했죠. 민간인인 줄 알면서도 총을 갈긴 거예요. 적군도 아니고 민간인인데. 저는 아버지와 함께 갯벌에 몸을 숨겼어요. 거기에서 비행기가 잠잠해질 때까지 가만히 엎드려 있었지요. 오후가 되니까 폭격이 멈췄어요. 아버지는 작은 배로 고기를 잡고 살았는데, 물이 들어오자마자 그 배를 타고 영종도로 피란을 갔어요.”
나룻배를 타고 영종도로 피란을 간 주민들은 황금빛 맑은 가을하늘을 보면서 피눈물을 뚝뚝 흘려야 했다. 당시 22살이었던 윤정여씨는 정확한 숫자는 모르지만 기관총에 맞은 많은 주민들이 물 위에 둥둥 떠 있었다고 한다.
다른 주민들은 갯벌에 물이 불어나자 뭍으로 올라와 나무 그늘에 숨었고, 어스름 녘이 돼서야 마을에 돌아올 수 있었다. 이날 종일 굶었던 주민들은 먹을거리가 폭격으로 다 타서 텃밭의 감자를 캐 먹었으며, 언제 또 폭격이 들이닥칠지 몰라 옷을 입은 채로 잠을 청했다.
송도에 있는 외갓집에 머물던 정용구 씨의 아내는 폭격 소리를 듣고 남편을 찾아 월미도로 달려갔다. 하지만 생지옥이 따로 없는 마을을 바라보면서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미군의 폭격으로 아버지 정용구 씨를 잃은 정지은 씨의 말이다.
“어머니께서는 비행기가 월미도를 폭격하는 것을 보고 아버지를 찾아 달려갔어요. 도착하니까 집은 다 타버리고, 여기저기 널린 시신들은 누가 누군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돼 있었죠. 어머니는 여러 시신의 입을 열어보고 나서야 아버지를 찾을 수 있었어요. 아버지는 치아가 안 좋아서 금이빨을 하나 했는데, 거기에 별표가 있었거든요. 어머니는 아버지를 이불로 말아서 가묘를 하고 월미도에서 빠져나왔어요.”
9월 11일. 최초 폭격이 벌어진 다음날 월미도는 잠잠했다. 하지만 생존자들은 슬프고도 슬픈 하루를 눈물로 보내야 했다. 가족을 잃은 이들은 허물어진 건물에서 불에 탄 시신을 찾아 땅에 묻었고, 길에 쓰러져 있던 희생자들의 시신도 수습해 가묘를 만들었다.
심장이 터질지는 것 같은 분노를 억누르는 것도 잠시, 12일과 13일 다시 폭격이 시작됐다. 전투기 소리에 놀란 주민들은 겁을 집어먹고 일제히 흩어져서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네이팜탄이 떨어진 곳의 사람들은 사지가 잘려나갔고, 몸뚱이에는 살덩이만 남았다. 어떤 이들은 외마디 비명조차 내지 못하고 기관총탄에 맞아 쓰러졌다. 그렇게 모두 죽어갔다.
미군 기지가 된 월미도 민간인 거주 지역
9월 10일. 미군의 전폭기 14대가 네이팜탄을 월미도 동쪽지역에 투하하고 월미도 원주민들을 향해 로켓포와 기관포를 발사했다.
11일에는 태풍 때문에 미항공 모함이 일본 사세보로 귀항해 폭격하지 않았다. 그러나 12일과 13일 다시 출격해 10일과 유사한 폭격으로 원주민 마을을 지도에서 없애 버렸다. 14일에는 월미도 서쪽 인민군 주둔지에 이전보다 몇 배에 달하는 폭격을 가했다. 이 폭격으로 지하벙커가 무너지면서 월미도를 수비하던 인민군 400명 중 100명이 몰살당했다.
9월 15일 드디어 인천상륙작전이 벌어졌다. 당시 월미도에는 차마 고향을 떠나지 못했거나 폭격으로 부상당했던 원주민, 인민군의 부역을 했던 인천지역 민간인, 인민군들이 있었다. 하지만 미군은 이들을 모두 사살하고 월미도를 한 시간 만에 점령했다. 이 사실은 10일 미군의 폭격을 피해 도망 나온 원주민들의 증언으로 추측할 수 있다.
원주민들은 하인천 쪽 다리 끝(당시 원양냉동)에 판잣집을 짓고 고향에 돌아갈 날을 학수고대했다. 하지만 미군이 월미도 접근을 막아 다시는 돌아갈 수 없었다. 유청시 씨는 “월미도에서 도망 나온 뒤 주민들은 다시 그곳에 들어가려고 했지만 미군들은 바닥에 총을 갈기면서 위협해 들어갈 수 없었다”고 증언했다.
이날 이후부터 원주민들은 섬에서 나오거나 들어가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12일과 13일 미군의 폭격으로 희생된 주민들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는다. 한인덕 씨도 가족이나 가까운 친구 등 특별한 관계의 사람들만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전쟁이 나서 대부분 피란 갔지만 폭격이 있기 전에 모두 돌아와 있었어요. 남의 집에 있는 것도 삼사일이잖아요. 인민군이 점령한 뒤 단 한 번도 해코지했다는 소리도 듣지 못했고요.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아예 피란을 가지 않았습니다. 예전처럼 120가구 600여 명의 주민이 모두 살고 있었다고 봐야죠. 하지만 아직까지 원주민 30여 가구에 대한 소식은 없어요.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죠. 5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연락이 없는 것을 보면 폭격으로 온 가족이 몰살당한 게 분명해요.”
이범기 씨는 “미군이 월미도에 있는 사람들을 죽인 뒤 시체를 매장하지도 않고 불도저로 밀어버렸다는 소문은 들었다”고 말했다.
첫 폭격이 있던 10일 미군의 항공공격보고서에 따르면 전폭기들의 폭격대상은 인민군 주둔지가 아니었다. 민간인 거주지역에 대한 ‘집중폭격’ 또는 ‘전소’(burn out)였다. 여기서 ‘집중폭격’(Saturation Bombing)은 적이 있는 일정지역을 목표로 설정해 집중적으로 무차별 폭격한다는 뜻. 미군이 민간인 거주 지역을 적의 주둔지로 착각하지 않았다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공격이었다.
생존자들과 함께 이 사실을 확인해 보기 위해 직접 현장을 찾았다. 생존자들은 민간인 거주 지역은 현재 공원 한복판이고, 인민군 주둔지는 울창한 나무들이 늘어선 인근 산 쪽이었다고 일제히 손을 들어 가리켰다. 민간인 거주 지역에 서서 인민군 주둔지를 쳐다보았다. 어림잡아도 400m 이상 떨어진 곳이었다. 전폭기 조종사가 이 정도의 거리도 구분하지 못하고 폭격했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혹시 미국은 월미도에 민간인이 거주한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은 아닐까. 하지만 생존자들은 “미군은 잘 알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미군은 해방 후 월미도 민간인 마을 10m 앞에 있던 일본 해군기지에 미군 기지를 설치했어요. 1949년 일본으로 일시 철수할 때까지 이곳에 진주해 있었지요. 인천상륙작전 후 다시 월미도 해군기지에 들어왔던 미군 부대원들이 당시 철수했던 바로 그 군인들이에요. 미군기지에서 일했던 월미도 주민들이 말해줘서 동네 사람들도 모두 알고 있어요.”
한인덕 씨는 폭격 당시 미 해군을 돕는 한국 군인들도 있었다고 증언했다. 그는 “월미도를 폭격을 할 때 한국 간부급 군인들이 관여했다”면서 “이들이 월미도 지형이나 밀물, 썰물의 조수차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안내가 필요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한국 군인들은 미군이 월미도 민간인 거주 지역을 폭격한다는 사실을 미리 알면서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고 묵인한 것이 된다.
이 같은 정황으로 미뤄볼 때 미군의 월미도 폭격은 인민군 살상이 아니라 월미도의 모든 것을 파괴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인천상륙작전 관련 문서에도 ‘월미도 민간인 거주지에는 군인이 안 보인다’는 단편적인 보고 외에는 적병에 대한 인적 전과를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미군은 왜 원주민들까지 학살하면서 월미도를 초토화시키려고 했던 것일까. 정지은 씨의 말에서 그 의문의 실마리는 찾을 수 있었다.
“미군은 인민군과 민간인 가리지 않고 월미도 모든 지역에 폭격을 했어요. 하지만 민간인 거주 지역 가까이에 있었던 해군해안경비대 시설은 폭격하지 않았지요. 미군 기지로 사용하기 위해서요. 그 당시 갯벌을 건너 몰래 마을에 가보았는데, 미군들이 폭격 희생자들을 가매장해 놨던 곳을 모두 불도저로 밀어버리고 기지를 세워놓았더라고요. 돌아가신 분들에 대한 예의 없이 쓰레기처럼 취급한 거예요. 그래서 저는 아직까지 아버지 묘지도 없이 평생 살아왔어요.”
한인덕 씨도 미군은 월미도에 자신들의 기지를 세우려고 민간인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고 주장했다.
“월미도 원주민들을 죽인 건 두 가지 이유예요. 인천상륙작전 때문이기도 하지만 여기에다 미군 기지를 만들려고 그런 거지요. 아무리 그래도 살아난 사람은 살려야 할 것 아니에요. 그런데도 모두 다 죽였어요.”
월미도에서 쫓겨나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원주민들의 삶은 비참했다. 판잣집에서 기거하며 풀뿌리와 죽으로 끼니를 연명했다. 미군의 폭격으로 아버지를 잃은 정지은 씨는 더욱 그러했다.
“인천상륙작전 뒤 송도에 피란을 갔어요. 이곳에 주둔해 있던 군인들은 밤이 되면 민간인 마을로 내려와 부녀자들을 강간하러 다녔지요. 우리는 문도 없는 방에서 거적 대기를 걸어놓고 살았는데, 어머니는 밤에 군인들이 나타나면 삼 남매를 막 꼬집었어요. 군인들은 애들 셋이 우니까 그냥 돌아가곤 했지요. 머리맡에다가 낫을 갖다 놓고 자기도 했고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월미도 원주민들
생존자들과 함께 쉬엄쉬엄 월미공원을 한 바퀴 돌았다. 참으로 단아한 공원이었다. 이곳을 찾은 사람들도 공원을 거닐면서 순진한 기쁨을 포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이곳에는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듯했다. 유족들의 가슴 깊은 곳에서 피어난 슬픈 꽃향기였다. 애매한 웃음과 고통이 뒤범벅이 된 생존자들의 눈망울을 바라보면서 가슴속에 맺힌 한이 얼마나 큰지 새록새록 느껴졌다.
한인덕 씨의 가슴에도 하루에 수백 번씩 대못이 박힌다.
“처음으로 위령제를 지내던 날 김형수 씨가 공원 담 너머를 바라보면서 ‘저놈의 새끼들 우리 집터에다 저렇게 다 지어놨네’라고 말하고는 그대로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갔어요. 정말 가슴 아픈 일이에요.”
옛 월미도 자료 뭉치를 보여주며 하나하나 설명해 주던 전천봉 씨도 마음이 답답한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월미도 폭격은 미군의 계획적인 살인입니다. 우발적인 살인이 아니라고요……. 인명피해, 재산피해는 두 번째예요. 한국전쟁 때 우리만 피해본 게 아니니까 보상도 원치 않습니다. 단 한 가지 옛날부터 살아왔던 고향인데 왜 우리가 그곳에서 살 수 없느냐는 겁니다.”
정지은 씨도 공원 조형물에 인쇄된 옛 월미도 풍경을 가리키면서 혀를 찼다.
“정부에서는 우리가 이곳에서 대대로 살았다는 증거가 없다고 말했어요. 공원에다가 이렇게 월미도 주민들이 살았다고 사진을 붙여 놓고도 딴소리를 했었죠.”
월미도 주민들은 19세기 중반부터 이곳에 집을 짓고 어업에 종사하며 살았다. 때문에 정부는 이들의 생존권을 인정하고, 1899년 일본인들에게 월미도 개간을 허가할 때 원주민 주거지를 특별히 제외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도 원주민 거주지에 군사기지를 만들면서 대토를 내주었고, 1942년 월미도공원 조성을 위해 원주민 거주지를 철거했을 때도 인근에 2,400평을 마련해 옮겨 살게 했다. 해방 후 정부는 ‘귀속재산처리법’을 공포하고 거주지를 거주민들이 매수할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절차상의 문제로 등기신청이 지연되다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결국 이곳에 미군기지가 들어섰다.
주민들은 전쟁이 끝난 뒤 대책위원회를 만들고 인천시청 등에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들은 번번이 거절당했다. 윤인덕 씨의 말이다.
“1971년 국방부는 월미도 주둔 미군군사시설을 인수하면서 국유지로 만들어버렸고, 이 땅을 매입한 인천시는 월미공원을 조성했습니다. 학구전쟁 때 피란 갔던 사람들은 모두 고향에 돌아갔는데 우리만 돌아가지 못하고 있지요. 일본 정부가 그렇게 악랄했다고 해도 우리 정부처럼 이렇지 않았어요. 공평하게 살길을 마련해 주는 것이 법인데 왜 우리한테는 아닙니까. 우리는 생활의 터전, 생존권까지 잃었습니다. 부모, 자식 유골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못 가지고 나왔어요. 인간으로서 갖춰야 할 것은 다 잃었습니다. 하지만 정부는 아직도 법 타령만 합니다.”
미군의 월미도학살사건의 생존자들이 하나둘씩 끓는 피를 가슴에 품은 채 늙고 병들어 생을 마감하고 있다. 이제라도 국가는 인천상륙작전의 희생물이 된 월미도 원주민들의 고통에 응답하고 이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
월미도 원주민들은 오늘도 간절히 귀향을 노래한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를 부르면서.
인천상륙작전의 신화에 감춰진 월미도원주민학살
국제인도법, 전쟁법에는 민간인 면제규범이 있다. 전쟁과 무관한 민간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이 규범에 따라 공중폭격을 할 때는 무고한 피해자의 발생을 막기 위해 작전 실행 전 사전 대피 경고를 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미군은 아무런 조치 없이 민간인들을 학살하고, 그 땅에 기지를 세웠다. 천인공노할 ‘전쟁범죄’다.
정부는 10일뿐 아니라 12일에서 15일까지 펼쳐진 미군의 행적과 월미도 원주민들의 피해규모를 축소했다. 더욱 유감스러웠던 것은 미군의 월미도원주민학살을 인천상륙작전의 예비작전으로 규정하면서 진실규명과 보상에 대한 책임소재를 정확하게 밝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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