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미군의 민간인학살사건

①권평근·이석우 피살사건 - 미군은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이었다

이동권 2023. 6. 5. 10:30

1945년 9월 8일 미 군함에서 인천항을 바라보고 있는 하지(Hodge)장군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1945년 9월 8일. 인천항은 인산인해였다. 인천항에 입항하는 미군을 환영하러 나온 인파였다. 8월 15일 일본천황의 항복 이후에도 계속 인천 지역의 치안을 맡고 있던 일본경찰은 미국의 명령에 따라 인천항 전역에 통제령을 내린 상황이었다. 하지만 인천시민들은 한 손에는 태극기, 한 손에는 성조기를 들고 환호성을 준비하고 있었다. 미군을 조선의 해방군으로 알았던 까닭이다.

 

바다 멀리서 미군 전투기 편대가 폭음을 내며 날아왔다. 금방이라도 공습을 하려는 것처럼 인천항 상공을 빠르게 선회했다. 마치 부둣가에 모인 사람들을 위협하는 모습이었다. 마침내 미 군함이 나타났다. 인천항에 제일 먼저 입항한 부대는 미 제24군단 7사단. 일본경찰의 호의를 받으면서 상륙한 이들은 환영 나온 시민들에게 노골적인 적대감을 보였다.

 

잠시 후 본정(현재 인천 중구 중앙동) 교차로 쪽에서 총성이 들려왔다. 조선노조 인천중앙위원장이었던 故 권평근(당시 47세)씨가 환영행렬을 위협하는 일본경찰에게 항의하다 총에 맞은 소리였다. 이어 일본경찰은 시민들에게 폴리스라인을 넘었다는 이유로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이 과정에서 보안대원 이석우(당시 26세)씨가 등허리에 총탄에 맞아 즉사했고 14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미군정의 지시 없이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미군정은 8선 이남의 분할 점령통치를 위해 입국해 일본 경찰에게 치안유지의 권한뿐만 아니라 그 구체적 가이드라인까지 제시했다.

 

권평근·이석우 피격사건으로 인천 시민들 사이에서 미군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일어날 조짐이 보였다. 식민지 조선의 운명이 일제를 거쳐 다시 미제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였다. 미군정은 이를 무마하기 위해 장교 30여 명을 여러 차례 조문하도록 했다. 또 미군 CIC (Counter Intelligence Corps:미 육군 소속의 방첩부대)를 시켜 사건 전말을 조사하도록 하고, 건국준비위원회가 일본관헌에 대해 엄중한 항의를 전달해 달라는 뜻도 받아들였다. 미국이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 것이다.

 

9일 미군 7사단은 17보병연대만 인천에 남겨놓고 서울로 향했다. 서울을 점령하기 위해서였다. 이날 오후 4시 6분 일본군은 미군에 공식 항복했고, 조선총독부 건물에는 일장기 대신 성조기가 걸렸다.

 

미군은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

 

10일 오전 10시 권평근·이석우씨의 장례는 인천시민장으로 성대하게 열렸다. 당시 신문들도 이 사실을 대서특필했다. 그만큼 시민들은 이 사건에 대해 관심이 높았다.

 

장례식이 끝난 뒤 유족들은 인천시민들을 향해 발포한 일본경찰을 미군정에 고소했다. 하지만 13일에 열린 군사재판에서 미군은 ‘일본 경찰이 폴리스 라인을 넘은 인천시민들에 총격을 가한 것은 정당했다’고 판정했다. 유족들은 곧바로 재심을 청구했지만 기각됐다.

 

 

1945년 9월 9일 조선총독부에 성조기를 올린 미 제24군단 7사단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이같이 미군이 일본경찰에게 무죄를 선고한 것은 조선의 분단과정과 깊게 관련돼 있다.

 

1945년 2월, 미국은 얄타회담에서 소련에게 대일본전쟁 참여를 요청했다. 이를 받아들인 소련은 8월 9일 만주로 진격한 뒤 이틀 만에 한반도에 입성했다. 소련이 파죽지세로 남하하자 미국은 다급해졌다. 미군의 목적은 조선의 ‘해방’이 아니라 ‘점령’이었기 때문이다.

 

소련이 한반도에 진입한 날 미 국무성은 긴급회의를 소집하고 딘 러스크 소령에게 대책을 맡겼다. 그는 조선 지도를 펼치면서 서울이 있는 남쪽은 우리가 갖고, 소련한테는 북쪽을 주자는 의견을 냈고, 이내 삼팔선이 그어졌다. 그리고 미국은 일본총독부에 밀사를 보내 당분간 지휘체제를 그대로 유지할 것을 명령했고, 일본은 조선 건국준비위원회에 모든 권한을 이양하겠다는 약속을 취소했다.

 

미군 장교들은 인천을 향하는 배에서 ‘제니스 75’라는 제목의 기밀문서를 읽었다. 이 문서에는 한반도의 정치·경제·사회·문화에 대한 내용은 물론 조선인과 일본인을 구별하는 방법까지 담겨 있다. 미군은 또 일본패망 4개월 전 ‘조선의 육·해군 정보조사서’를 미리 작성해 두었다. 이 문서에는 미군의 한반도 점령 때 필요한 국민들의 정서나 태도 등과 주둔 전 일본총독부를 통해 김구, 유억겸, 김성수 등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까지 입수해 기술해 뒀다. 이처럼 미군은 조선 점령을 위해 철저하게 준비했다.

 

미국 정부는 미 군함이 인천에 상륙하기 전 미군에게 ‘조선의 국민을 적국의 국민으로 간주하라’는 명령서를 전달했고, 한반도 전역에는 비행기로 포고령 1호를 배포했다. 이 포고령에서 미군은 스스로 ‘점령군’이며 ‘조선을 점령하기 위해 이 땅에 들어왔다고 정확하게 밝혔다.

 

이후 미군은 한국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 땅에서 수많은 민간인들을 학살했다. 

 

미군의 권평근·이석우 피살사건은 한국전쟁을 전후해 발발한 최초의 민간인학살이며, 결코 우발적이라고 볼 수 없는 미군정 초기의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