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0. 27. 23:18ㆍ이야기/그래 그 영화

영화 <빅매치>를 보고 불현듯 이런 생각을 했다. '왜 이 영화를 보러 갔을까.'
지쳤나 보다. 몇 개월 동안 세상 돌아가는 모양을 보면서 웃음도 많이 잃었다. 어둡게 드리운 그림자처럼 분노도 겹겹이다. 힘 한 번 제대로 써보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했던 많은 사람들을 보면서는 몸도 떨려왔다. 어떤 때는 뜨겁게 데워지지 않은 마음이 부끄러워 숨어 버리고도 싶었다. 휴식이, 잠시 생각을 멈출 시간이 절실했다. '이 나라가 과연 사람이 사는 곳인가.'
성공했다. 두 시간 동안 아무 생각 없이 화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천재 악당이 돈과 쾌락을 위해, 자신의 영민함을 과시하기 위해 사람 목숨을 담보로 벌인 게임에 기꺼이 동참할 수 있었다.
기분이 꽤 나아졌다. 가끔 피식 웃음도 나왔고, 긴장감도 스며들었다. 챔피언만을 위해 단순하고 어수룩하게 살았던 이정재가 악당과 당당히 맞서 형을 구하는 장면에서는 카타르시스도 느껴졌다. 특히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희망을 버리지 않는 이성민의 가족들은 '나'를 돌아보게 했다.
모르고, 수줍고, 부끄럽고, 약하다는 이유로 바짓가랑이만 붙잡고 있으면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비극적인 일들을 외면하거나 무릎을 꿇는 일들이 반복되다보면 미처 생각지 못한 작은 일에도 무너지고 만다. 운명은 내부에 있다. 결코 밖에 있거나 외부에서 조정하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중심을 잃지 않고 산다면 피를 말리는 고통도 이겨낼 수 있다. 영화 <빅매치>가 새삼 일깨워준 진실이다.
<빅매치>는 초특급 오락 액션을 표방하는 영화답게 빠르다. 한가롭게 그려진 첫 부분은 잠시 심호흡을 쉬도록 돕는 장치일 뿐. 전반부부터 상황은 긴박하게 연출되고, 이정재는 달리고 뛰어넘고 싸우는 고난위 액션을 수행한다. 특히 경찰서 탈출 씬과, 캐쉬엔젤 복도 싸움 장면은 압권이었다.
합은 최고다. 일일이 동선을 체크하고, 상황을 연출하지 않으면 영화의 전반적인 질을 떨어뜨릴 장면들이 많다. 하지만 이 영화는 부족함이 없다. 주연, 조연, 단역 할 것 없이 모든 배우들은 대단한 호흡을 자랑한다. 배우들 간에 아귀가 너무도 잘 맞고, 액션도 서로 어긋남 없이 조화롭다.
이제는 사라진 옛 서울역 건물과 축구 경기가 벌어지는 상암월드컵경기장을 영화의 배경으로 쓴 점도 좋았다. 늘 다녔고, 낯익은 공간이었지만 자세히 본 경험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이 영화를 통해 그곳들을 자세히 보게 됐다.
아쉬운 점도 있다. 최호 감독은 배우 이성민을 제대로 써먹지 않았다. 전반부에 악당에게 잡혀간 뒤 영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 흔한 싸움 한 번 제대로 하지 않는다. 이성민은 드라마 <골든타임>, <미생> 등으로 넓은 팬층을 확보하고 있다. 누가 감독이라고 해도 그를 적극 이용해 눈요기를 시켰을 법하다. 하지만 최 감독은 이정재를 부각시킨다. '이정재를 위한 영화'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우려먹는다.
보아의 존재감도 사뭇 빛나지 않는다. 이정재의 향방에 맞추다 보니 모두가 곁가지처럼 느껴진다. 신하균은 그나마 악당으로서 보여줄 것은 다 보여준다. 그런 악당이 있어야 이정재는 더욱 빛날 수 있다.
<빅매치>를 보면서 한바탕 즐겨보길 권한다. 연일 쏟아지는 뉴스에 지친 마음을 깨끗하게 털어버리고, 스스로 살아 있는 기운을 느끼고 싶을 때 좋은 영화다. 또 이 영화는 추운 겨울날 얼얼한 따귀를 후끈 달아오르게 할 것이다. 꼭 멜로 영화만 그러란 법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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