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폐허가 된 공간을 따라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미 사라진 과거의 장소들이지만 머지않아 닥칠 우리의 미래 모습인 것 같아 마음을 뒤흔들었다.
자연은 유유히 흘러가며 세월의 향기를 품고 있는데,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것들은 하나 같이 회색빛이다. 먼바다와 푸른 하늘, 끝없이 우거진 숲을 보면서 저절로 ‘서늘한’ 카리스마에 빨려 들어간다.
파괴된 인공이 자연과 엉켜있는 공간을 보는 기분은 ‘미로’다. 우리 삶의 터전이 저렇게 처참하게 부서질 수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안도감이 필요하다. 우리에겐 변하지 않는 미래를 만들 책임이 있고,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그려나가야 할 사명감도 필요하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는 현재에만 있지 않다. 우리의 아이들과 후대의 행복을 위해 현재를 잘 가꾸는 것은 어쩌면 가장 큰 삶의 에너지가 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지독한 욕망에 휩싸여 있다. 생명의 뿌리를 죽이는 재앙으로 우리를 몰아가고 있다.
소멸을 알지 못하면 생성과 성장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쾌락을 알지 못하면 사랑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다. 벤 리버스(Ben Rivers)는 폐허에서 새로운 희망을 건져낸다. 그토록 쓸쓸하고 공허한 재앙에서 따뜻한 신념을 끌어올린다. 그래서일까. 작가가 전하는 메시지는 매우 강렬했다.
전시장에는 어둡고 컴컴한 공간에 커다란 재앙이 내려앉았다. 네 개의 채널에서 영상이 동시에 상영되고 있었다. 영상은 후기 종말론적인 공상과학 영화 형식의 다큐멘터리였다. 하지만 영상에는 작가가 만들어낸 허구적 요소들이 포함돼 있었다. 인간들은 갖가지 문명의 이기가 남긴 폐허에서 태초의 원시인처럼 살아갔다. 파괴된 지구에서 말을 잃고 살아가는 미래의 인간들이다. 이들의 일상은 일종의 의식 같았다. 또 더 이상의 환경 재앙을 막아내려는 파수꾼처럼 근엄한 표정으로 관람객들을 노려봤다.
네 개의 영상이 보여주는 장소는 각기 달랐다. 대서양의 아프리카 서북구 부근 카나리제도의 스페인령 섬 란자로테, 일본의 나가사키 해안에 위치한 섬 군칸지마, 태평양 중남부에 위치한 섬 투발루, 그리고 영국의 서머셋이었다.
벤 리버스는 지구, 생명, 인간의 역사의 진화 과정을 추적하면서 지금은 실재하지만 곧 사라져 버릴지 모르는 장소, 문명사회로부터 고립된 곳, 잊히고 버려진 공간을 유토피아로 보여준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인간을 포함한 각기 다른 종(種)이 진화하는 모습을 연출한다.
벤 리버스의 시적인 영상과 함께 공상과학 소설 작가 마크 본 슐레겔의 상상력이 넘치는 글이 내레이션 된다. 하지만 내레이션이 영어로 낭독돼 정확하게 무슨 의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갤러리에서 관람객들에 대한 배려가 필요한 부분이다.) 변해버린 우리의 터전을 얘기하고, 인류의 변화를 촉구하는 메시지 같다는 것만 느꼈을 뿐이다.
지구는 몸살을 앓고 있다. 최근에는 환경오염, 구제역을 비롯한 각종 질병, 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원전사태, 대홍수 같은 기상이변 등으로 생태계가 파괴되고 있다. 이러한 자연생태계 변화는 점점 심각해져 정치사회적 문제로까지 번지고 있다. 환경 문제와 생태 위기가 바로 눈앞에서 벌어지는 전 지구적 재앙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들의 관심은 아직도 멀다.
벤 리버스의 영상은 전쟁처럼 무서운 것이 환경재앙이라고 경고한다. 낯익은 모든 것들을 파괴하고, 연약한 인간이 기대어 사는 터전을 없애버린다고 일갈한다. 하지만 이러한 결과를 알면서도 인간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이보다 더 어리석을 수 있는가.
이제 남은 것은 공간을 지키는 것이다. 욕망을 접고 인간과 자연이 더불어 사는 삶을 이야기를 할 때가 됐다.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된다. 거칠고 암담한 세상으로 뻗어가는 이 세계의 탐욕을 끊어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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