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원시원하고 자신감이 넘친다. 한국 패션을 짊어지고 나갈 후학들을 양성하는 선배로서 힘이 느껴진다. 이 사람이면 믿고 가도 괜찮겠다 싶을 만큼 패션에 대한 열정도 단단하고, 세상을 보는 안목 또한 뛰어나다. 여러 산업 현장에서 길러진 맷집 탓이다.
현대 사회에 들어서면서 브랜드와 독창적인 디자인에 대한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겠지만, 패션은 인체공학과 기능, 그리고 멋을 동시에 만족시켜야 하는 첨단의 산업이다. 짝퉁, 이미테이션 등 복제와 표절이 난무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안동연 패션스쿨 모다랩 학장은 재능 있는 인재들을 계속해서 배출하기 위해 경주하고 있다. 한국의 패션산업 발전을 위해서는 후학 양성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판단이다. 하지만 교육 사업은 직업 이전에 사명감이 필요하다. 단순히 기능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재능을 발굴하고, 감각을 키워주며, 자신의 일에 대한 자부심을 심어줘야 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패션은 개인의 생활뿐만 아니라 정치·사회·경제·문화와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디자이너가 트렌드를 선도하고, 스타일을 창조하는 것은 유행의 결과물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척도가 된다. 반대로 디자이너가 사회를 읽지 못하면 디자인은 도태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안동연 학장은 디자이너로서의 역량을 키우는 것 못지않게 사회 진보나 환원에도 관심을 놓지 않는다. 특히 교육 현장에서 권위를 내려놓고 진심을 다해 학생들과 소통하고 있다.
“어렸을 때는 선생님과 제자의 입장에서 가르쳤는데, 나이가 드니까 업계 선후배 관계라는 마음이 크다. 이 업계를 함께 이끌어가야 하고, 패션 산업의 발전을 위해서 함께 노력해야 할 사람들이 학생들이기 때문이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더라도 선배의 입장으로 일하고 있다. 또 모다랩은 무상교육을 시작하려고 한다. 기초생활수급자나 차상위계층 등 공공 기관의 추천을 받아서 3개월에 한 번씩 10명 정도를 지원하고 취업까지 연결시켜줄 계획이다. 이쪽 분야는 돈이 많이 들어가는 교육이다. 꿈만 가지고 되지 않는다. 모다랩은 디자이너를 꿈꾸는 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
안동연 학장은 서울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유년시절을 보내고 중·고등학교는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학창 시절을 지냈다. 그리고 미국 대학에서 순수미술을 전공하고, 본격적으로 보석 공부를 하면서 국제 감정사와 국제 세공사 그리고 디자이너의 길로 들어섰다. 국내에서 감정, 세공, 디자인 세 분야에서 정통한 사람은 몇 안 된다.
안 학장이 주얼리 디자이너가 된 것은 중학교 시절의 경이로운 경험 때문이다. 안 학장의 아버지는 건축가였다. 그녀는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를 따라 살바도르 달리의 전시회에 갔다. 그곳에서 달리의 보석 작품을 만난 뒤 큰 감동을 받고 보석 디자이너가 되기로 결심했다.
“아버지가 초현실주의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의 전시회에 데려갔다. 회화 작품인줄 알았는데 보석전시회더라. 달리가 디자인한 보석 작품을 보고 반했다. 빛, 색상, 보석의 반짝임이 너무 좋았다. 전시회장에서 아버지가 얘기했다. 내가 그쪽으로 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전시회에 데려왔다고. 순수미술을 전공했지만 결과적으로 주얼리 디자인 분야로 가게 됐다.”
살바도르 달리는 20세기 미술에 큰 족적을 남긴 화가로 영화, 연극, 패션, 광고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
안동연 학장은 공부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대기업 주얼리 브랜드에서 디자이너로 일했다. 하지만 그녀의 직장생활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아무래도 미국에서 자유롭게 공부한 데다 첫 직장이어서 적응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 한국에서는 주얼리 디자인이라는 개념이 일반적이지 않았다. 주얼리 디자인을 가르치는 대학조차 한국에 없었다. 최근에야 주얼리 디자인이 각광받고 있지만 예전에는 재화로만 인식됐다.
“대기업이라서 규율이 엄격했다. 유니폼도 입어야 했다. 또 주얼리를 디자인보다 재산적인 가치로만 봤다. 보석도 그렇다. 금은 무게를 달고, 보석은 크기로 가격을 매겼다.”
이후 안 학장은 이스라엘 다이아몬드 회사의 딜러와 바이어 일을 시작했다. 한국 지사의 대표도 됐다. 하지만 안 학장은 맘 한 구석이 왠지 허전했다. 그녀는 뒤떨어진 한국의 주얼리 산업을 발전시켜 보석에 대한 인식을 전환시키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얼리를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올려야 했고, 실력 있는 디자이너를 배출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안동연 학장은 후학을 길러내는 일에 뛰어 들었다. 프로페셔널한 전문가를 키워내는 것이 주얼리 산업의 앞길을 여는 것이었고, 한국의 보석 산업을 전 세계에 알리고 발전시키는 것이라 여겼다. 특히 패션 분야는 계속해서 분화되고 다원화되고 있었다. 소수의 엘리트들에 의해 지배되는 산업도 아니라 누구나 즐기고 찾는 생활의 아이템으로 기반이 확대되고 있었다.
안 학장은 1996년 3월 압구정동에 주얼리 디자인 교육기관인 JDMI를 설립했다. 1998년에는 IED 그룹 프란체스코 모렐리 총장과 쥬세페 바르비에리 학장으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아 협력 계약을 체결하고, 10년 동안 1,200명의 국내외 디자이너를 배출했다. 그녀는 많은 후배들을 양성하면서 커다란 보람을 느꼈다.
“후배들이 국제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거나 본인이 창업을 한다든지 해외 명품 브랜드에서 일하거나 큰 회사의 디자인 팀장, 실장을 하고 있을 때 보람이 크다. 어떤 친구들은 교육기관을 만들기도 했다. 비즈니스를 시작할 때 예상한 일이다. 그래도 기분은 좋다.”
하지만 아직 한국의 주얼리 디자인은 세계 수준을 따라가지 못했다. 세공 기술은 앞서고 있지만 디자인은 낙후돼 있었다. 그래서 안 학장이 고민한 것은 ‘패션’이었다.
그녀는 “패션산업이 앞서가야 가방이나 주얼리도 따라오게 돼 있다”고 확신하고 과감히 패션 분야 접수에 들어갔다. 한국 패션의 역사는 짧지 않지만 세계 수준에 비하면 많이 뒤처져 있는 상황이었다.
안 학장은 더 큰 사명감을 안고 이태리 보석 디자이너들, 주얼리 브랜드인 안소니앤테스과 함께 패션디자인과 마케팅 교육기관인 패션스쿨 모다랩을 설립했다.
그녀는 모다랩을 한국을 빛낼 최고의 글로벌 패셔니스타를 양성하는 곳으로 키우는 게 목표였다. 그래서 독특하고 차별화된 교육과 다양한 전공을 공유하는 커리큘럼을 마련하고 해외 유수의 학교들과 교류를 맺었다. 또 주얼리 디자이너라고 해서 주얼리만 가르치지 않았다. 주얼리 공부하면서 여러 분야의 일을 배우도록 했다. 이러한 교육은 패션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게 해 자신의 분야에 대한 자신감을 심어주는 결과를 낳았다.
“모다랩은 다른 교육기관과 두 가지가 다르다. 모다랩은 패션, 액세서리(가방, 구두 등), 주얼리를 종합적으로 가르친다. 국내에서 이 세 가지 분야를 가르치는 곳은 없다. 그래서 모다랩은 패션종합디자인스쿨이다. 국내 최초이자 유일하다. 또 다른 교육기관들은 에이전시지만 모다랩은 해외 학교들과 파트너십 계약이 돼 있다. 모다랩을 나오면 이탈리아 학교로 자동 편입된다. 거기에서 수업을 연장해 더 깊이 공부할 수 있다. 또 이탈리아는 학교가 취업을 지원해주기 때문에 평생 직업으로 일할 수 있고, 아니면 국내로 돌아와 활동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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