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8. 25. 18:35ㆍ책/칼로 새긴 장준하
장준하 일행은 중앙군관학교를 떠날 때 가졌던 초심으로 돌아왔다. 뺨을 맞았던 동지들의 얼굴도 활짝 핀 나팔꽃처럼 밝았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천연덕스럽게 농담하는 여유도 보였다. 때마침 라오허커우에 있는 리쭝런 사령부에서 보급품이 들어왔다. 일행은 뛸 듯이 기뻐하며 밀가루와 동복, 외투를 지급받고 다음 목적지인 라오허커우로 향했다. 걸어서 사흘이면 닿을 거리였다.
장준하는 가뿐한 마음으로 나섰다. 무엇보다 동지들의 표정이 명랑해 선발대로 떠나는 기분은 한결 가벼웠다. 수레를 끌고 하얀 눈이 수북이 쌓인 벌판을 걸어 초가집 열두서너 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은 마을에 숙소를 잡았다. 그는 보급품으로 받은 식재료로 저녁에 먹을 음식과 다음날 점심에 먹을 밀가루빵을 준비해 놓고 일행을 기다렸다.
하늘에 별이 총총히 떠 반짝이기 시작했다. 초승달은 예스러운 자태를 뽐내며 산봉우리에 걸쳤다. 찬바람도 서서히 잦아들며 유난스레 고즈넉했다. 그러나 일행은 밤이 깊어도 도착하지 않았다. 장준하는 걱정 섞인 눈으로 걸어왔던 길을 쳐다봤다. 필연코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올빼미 우는 소리가 허공을 맴돌며 그의 걱정을 연신 부추겼다. 인기척은 자정이 다 돼서야 들렸다. 일행들이 기저귀를 찬 아이들처럼 다리를 벌리고 아장아장 걸어왔다. 원흉은 옴이었다. 일행들은 전신에 돋아난 옴이 곪아 터지면서 극심한 가려움증을 겪었다. 특히 걷는 동안 연약한 사타구니 살이 마찰이 되면서 벌겋게 부어올라 쓰라렸다. 이들은 도착하자마자 겨울만 아니라면 발가벗고 걷고 싶을 정도라고 하소를 터뜨렸다.
다음날 제갈공명의 생가와 사당이 있는 마을에 도착했다.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일행은 계속 뒤처져 언제 올지 몰랐다. 장준하와 김준엽은 일행을 기다리면서 잠시 기행을 떠났다. 두 사람은 평소 삼국지 광팬이었다. 제갈공명의 흔적을 보지 않고서는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제갈량의 고향은 고륭중이라는 작은 마을이었다. 사방은 송백나무가 자라는 산으로 둘러싸였고, 사이사이마다 냇물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위패를 모신 사당은 그의 명성에 맞지 않게 작고 아담했다. 오직 대륙 통일이라는 대업을 이루기 위해 청빈하게 살았던 그의 삶과 딱 맞는 듯싶었다. 두 사람은 잠시 조국 독립의 뜻을 잊고 한가로이 거닐면서 옛 명인의 업적을 구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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