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6 - 장준하 일대기 072. 동병상련의 마음 - 라오허커우에 도착

2026. 8. 25. 18:34ㆍ책/칼로 새긴 장준하

멀지 않았다. 하루만 걸으면 중국군과 일본군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라오허커우에 당도했다. 보급품으로 받은 밀가루가 벌써 바닥을 드러냈다. 선발대는 조용한 마을에 숙소를 잡고 시장에 나가 장을 봤다. 정육점 주인이 장준하 일행이 한국인인 것을 알아채고 기쁜 동정을 전했다. 라오허커우에 한국광복군 전방 파견대가 머문다는 소식이었다.


장준하 일행은 난양을 떠난 지 나흘째 되는 날 라오허커우에 도착했다. 라오허커우는 꽤 큰 도시였다. 주민들도 많았고, 군사시설도 곳곳에 세워졌다. 광복군이 일행을 마중 나왔다. 중앙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충칭으로 향하는 한국인 53명이 온다는 기별이 라오허커우에 벌써 닿아 있었다. 장준하는 모국어를 하는 동지들이 만나자 뛸 듯이 기뻤다. 피는 무서웠다. 생면부지의 사람들인데도 곧바로 정이 갔고 자연스럽게 의지가 됐다. 일제의 횡포와 숱한 고난을 함께 겪은 동병상련이었고, 낙엽처럼 흩어져 지내는 한국인들이 조국에 함께 모여 살기를 바라는 바람이 똑같아서였다. 라오허커우에 주둔한 광복군은 전방 파견대가 아니라 중국군 제5전구사령부 제1지대 분견대로, 인원은 소대장을 포함해 3명밖에 되지 않았다.


소대장은 장준하 일행에게 충칭까지 가는 비행기 편을 마련해 주겠다고 약속하며 라오허커우에서 푹 쉬다 떠나라고 했다. 누구라도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비행기를 타지 않고 충칭에 가려면 한 달을 꼬박 걸은 뒤 배를 타야 했다. 일행은 환호성을 지르며 라오허커우에 머물기로 했다.


숙소는 절간처럼 컸다. 최고급 목재를 사용해 고풍스러웠고, 번화가와도 동떨어져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풍경 소리만 바람에 댕그랑거리며 고요한 적막을 깼다. 기와지붕에는 풀이 듬성듬성 자랐다. 추녀 끝에는 겨울새들이 앉아 쉬었다. 숙소 뒤 가파른 절벽 밑에는 대륙을 장류하는 장강(양쯔강)이 흘렀다. 강 너머에는 웅장한 산들이 펼쳐져 감탄사를 절로 불렀다.


장준하 일행은 아름다운 경치에 도취돼 한참 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속세에 나오지 않고 이곳에 꾹 박혀 지내면 전쟁의 화마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숙소 가까운 곳에 거대한 군사 기지와 공장이 있는 게 흠이었다. 장준하는 검은 연기를 내뿜는 군사시설을 보면서 인간들이 일으킨 무분별한 전쟁과 산업화가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망치는 것 같아 밥맛이 싹 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