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8. 25. 17:56ㆍ책/칼로 새긴 장준하
장준하는 한국침투공작에 참여하기 위해 사물함을 정리했다. 옷이나 생활용품, 신문이나 수첩 같은 것을 모두 꺼내 불에 태웠다. 없어도 생활하는데 불편하지 않았고,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물품이었다. 그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빛을 바라보면서 가슴 끄트머리에 남아있던 삶의 애착까지도 모두 불속에 던졌다. 26년의 삶과 결별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미련도 가지면 안 됐다. 모든 것을 후련하고 깨끗하게 털어내야 한국침투공작도 성공할 수 있었다.
장준하는 일기장과 잡지 <등불>과 <제단>은 소각하지 않았다. 그는 1944년 7월 7일 일본군에서 탈출할 때부터 1년 1개월 동안 일기를 썼다. 촌각을 다투는 시간에는 잠시 미뤄뒀지만 하루하루 벌어진 갖가지 사건과 여러 곳에서 만난 인물들을 꼼꼼하게 노트에 기록했다. 일기에는 그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일기장에는 배고픔과 갈증, 갈등과 반목으로 고생했던 사연부터 마음속에서 문득문득 뭉클하게 솟아오르던 감회까지 낱낱이 담겼다.
<등불>과 <제단>은 그가 실의와 허탈에 빠질 때마다 용기를 북돋아 주던 매개였다. 학문에 대한 열정과 시대정신을 고스란히 담아낸 사색의 산물이었으며, 동지들의 피땀으로 만들어낸 노력의 결과물이었다. 장준하는 일기장과 잡지를 큰 봉투에 넣어 포장했다. 봉투에는 가족들에게 남길 유서도 짧게 써넣었다. 봉투 겉면에는 부모님이 계신 고향과 아내의 친정 주소를 적었다. 그는 김준엽을 찾아가 혹시라도 자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봉투를 가족들에게 우편으로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
다음날 이범석 장군이 장준하를 호출했다. 한국침투공작에 참여하려는 그의 마음을 돌려보려는 의도였다. 이범석 장군의 의지도 있었지만 장준하를 아끼는 김준엽의 마음이 전해져 마련된 자리였다. 장준하는 황송한 마음에 몸 둘 바 몰랐다. 이 장군은 남다른 기개와 지사적 충정으로 광복군 안팎에서 존경을 받았다. 그런 인물이 자신과 면담하자고 청하니 송구한 마음까지 들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조국 독립의 한길에 몸 바치려는 장준하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일제의 사슬을 끊어내고 해방된 조국 땅에 묻히고 싶은 바람을 굽힐 위인이 아니었다. 그는 민족의 제단에 자신의 피를 뿌리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했다.
사방은 온통 조용했다. 풀벌레들이 요란하게 울어대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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