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8. 25. 17:43ㆍ책/칼로 새긴 장준하
한국으로 진입하던 수송기가 기수를 갑자기 틀었다. 도쿄로 진입하던 미국항공모함이 일복특공대의 습격을 받아서였다. 장준하 일행은 몸의 기운이 쏙 빠지면서 정신이 멍했다. 한차례 가벼운 한숨을 내쉬더니 아무런 말도 없이 어색한 침묵에 빠졌다. 조국의 산하에 발을 디디는 간절한 바람이 일순간에 꺾였기 때문이었다. 이범석 장군도 시험에 낙방한 수험생처럼 허탈한 눈빛으로 멍하니 창밖을 쳐다보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군국주의의 꿈꾸는 일본군에 대한 실망보다는 꿈에도 잊지 못할 조국에 들어갈 수 없는 절망이 더욱 컸다.
일본은 마땅히 패망을 피해 갈 수 없는 운명에 놓였다. 그러나 한국의 운명도 그리 간단치 않았다. 소련은 며칠 전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남하를 시작했다. 미국은 일본의 항복이 가까워지자 소련에게 만주 일대의 일본군을 격퇴하면 러일전쟁 당시 빼앗겼던 권리를 모두 회복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소련은 미국의 조건을 수락하고 일본과 본격적으로 전쟁에 돌입했다. 장준하는 소련이 남하하는 상황에서 한국이 해방되면 공산주의자에게 유리한 상황이 전개될 것 같아 우려했다. 어떻게든 한국을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세우고 싶은 개인적인 여망 때문이었다.
8월 15일 미군사절단은 장준하 일행에게 다시 대기명령을 내렸다. 언제 출발할지 알 수 없지만 조만간 한국으로 떠날 것은 확실했다. 장준하는 또다시 꿈에 부풀었다. 잠도 오지 않았고 밥도 잘 먹지 못했다. 조국에 가고 싶은 생각만 은근이 애를 태웠다. 특히 어머니가 가마솥에 보글보글 끓여 주던 된장우거짓국과 시원한 동치미가 생각나 미칠 지경이었다.
사흘 후 새벽 이범석 장군, 장준하, 김준엽, 노능서 4명이 무기와 탄약만 지참하고 수송기에 올랐다. 인원을 줄이고, 개인 휴대품을 소지하지 말하는 미군의 요청이 있었다. 일본군의 공격에 대비해 수송기를 가볍게 하려는 의도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미군사절단의 도움을 받는 이상 거절할 수 없는 청이었다.
이범석 장군은 수송기 창밖으로 인천 앞바다가 보이자 감회에 젖어 눈물범벅이 된 눈을 손수건으로 찍어냈다. 장군의 손수건에는 ‘지금까지 구차하게 목숨을 유지한 이유는 조국에 보답하기 위해서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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