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8. 25. 17:39ㆍ책/칼로 새긴 장준하
대립각을 세우던 미군사절단과 일본군의 마찰은 미군사절단이 돌아가는 것으로 일단락됐다. 그러나 연료가 부족해 수송기를 못 띄울 형편이었다. 일본군은 당장 비행기 연료를 구할 길 없어 다음날 보충해 주기로 했다. 장준하 일행은 본의 아니게 일본군 숙소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됐다.
미군사절단에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일인당 두 명씩 일본 헌병대의 경호가 붙었다. 사절단을 보호한다는 명분이었지만 사실은 사절단의 움직임을 철저하게 감시하려는 의도였다.
대좌는 다다미가 깔린 방에 목욕물까지 준비하며 미군사절단을 예우했다. 저녁에는 간단한 주연 자리도 마련했다. 이범석 장군은 일본군이 권하는 맥주를 마셨다. 이 장군은 일본이 패망했으니 조용히 돌아가라고 대좌에게 충고했다. 장준하는 이날 태어나서 처음으로 술을 입에 댔다. 김준엽이 승리의 잔을 한 번 들어보라고 권해서였다. 그는 술과 담배를 하지 않았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 집안인 데다 가풍이 검소하고 엄격해 절제가 생활화됐다. 그러나 이날만큼은 술을 거절할 수 없었다.
장준하는 강렬하게 증오했던 일본에게 칙사 대접을 받자 기분이 묘했다. 약소민족으로서 당했던 갖가지 모멸이 이 한잔 술로 조금은 위로가 되는 것 같았다. 이제 민족의 원분은 모두 털어내고 튼튼한 자주독립 국가를 만드는 일만 남은 셈이었다. 일본군이 물러나도 떵떵거리며 사는 친일파들이 없도록, 자유민주주의가 안정적으로 정착되도록, 부패한 지배 계층의 무분별한 횡포가 벌어지지 않도록 하면 됐다.
그는 일본이 항복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서울 하늘 아래 어디에서 총질하고 있을 자신을 떠올렸다. 남산이나 삼각산을 숙영지 삼아 종횡무진 일본의 주요 군사시설을 파괴하고 있거나, 무지막지한 일본군의 총칼에 진즉 숨을 거둘 수도 있었다.
주연장 밖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일본군 한 무리가 출입문을 발로 차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미군사절단을 죽이자는 말소리도 들렸다. 주연 분위기가 급속하게 가라앉았다. 헌병대가 일본군을 막아서며 시끄럽고 어지러운 난동을 잠재우긴 했지만 주연은 곧장 끝나고 말았다.
장준하는 다음날 새벽 일찍 일어나 창문 밖을 주시했다. 처음에는 남산과 삼각산의 윤곽만 보이더니 한강 수면에 낀 물안개가 걷히자 소나무들이 다복다복 돋아 예스러운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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