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8. 25. 17:06ㆍ책/칼로 새긴 장준하
장준하는 광복군 출신 동지들이 마련한 환영회에 초청을 받았다. 장소는 명월관이었다. 명월관은 1903년 개업해 1948년 폐업될 때까지 당대의 유명 인사들이 모이는 요정이었다. 조선 최고의 궁중요리와 문예에 뛰어난 미모의 기생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었고 왕족, 귀족, 친일파 정치인, 언론인, 예술인 등 다양한 부류의 유력인사들과 돈 많은 땅 부자, 상공인들이 모이는 공간이었다.
기생들은 술을 비우기 무섭게 안주를 입에 넣었다. 동지들은 흥에 겨워 기생들에게 돈을 던졌다. 숨 쉴 틈도 없이 가무가 펼쳐졌고, 난잡한 농담이 이어졌다. 장준하는 크게 실망했다. 고급 요리와 호화스러운 잔치였지만 조금도 즐겁지 않았다. 동지들이 대륙의 험난한 6천 리 행군, 충칭으로의 길을 다 잊은 듯했다. 고상한 척, 청렴한 척한다고 비아냥거리는 소리를 듣기 싫어, 차마 동지들을 물리치고 빠져나올 수 없어 그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임시정부 2진 요인들의 환영식이 열리는 날이었다. 장준하는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다. 주위에서 참여를 독촉했지만 경교장을 지키겠다고 따라나서지 않았다.
그는 허무했다. 종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삶만큼 허무한 것도 없지만 일제에게 짓밟힌 조국을 찾기 위해 헌신하겠다는 나섰던 애국지사의 고절이 국무위원들에게서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국무위원들은 세를 키우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외부 파벌과 결탁해 반대 세력과 싸우기 바빴다. 저마다 제 주장을 펼치며 정국을 주도하려는 것에만 집중했다. 사공이 많아 배가 산으로 가는 형국이었다.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은 한국이 미군정의 덫에 걸려 옴짝달싹 못한 상황에서도 그들은 한결같았다. 한국 민중의 삶과 조국의 번영과는 너무 동떨어진 행보였다.
장준하는 이승만 박사와 함께 일하는 고향 친구 최기일을 만났다. 김구 주석과 이승만 박사의 만남을 주선해 두 사람이 정국을 둘러싸고 펼쳐진 산적한 문제를 쾌도난마로 해결하길 바랐다. 분열된 국론을 모아 하루속히 조국을 본궤도에 올려놓고 도탄에 빠진 민생에 힘을 쏟길 원했다. 그 길이라면 스스로 기운을 내 다시 한번 더더욱 강한 열정과 각오, 투지로 일하고 싶었다. 한편으로는 낭패감에 젖거나 낙담에 빠질 때마다 살길을 모색해 줬던 <등불>과 <제단> 같은 잡지도 만들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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