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 - 장준하 일대기 127. 친일파 암살 배후 - 백범 선생의 죽음

2026. 8. 25. 17:02ㆍ책/칼로 새긴 장준하

1947년 장준하는 경교장을 나와 이범석 장군이 이끌던 조선민족청년단(족청)에 가입했다. 이 장군은 오랜 광복군 생활과 망명 생활의 경험에 기초해 청년단을 운영했다. 족청은 미군정의 지원을 받으며 급속히 성장해 자유당 정권에 깊숙이 개입했다. 장준하는 독립군 대장 시절 강건한 모습과는 딴판인 그에게 실망하고 족청에서 발을 뺐다. 이 장군도 정파 싸움에 여념 없었던 위정자들과 다르지 않았다.


이듬해 김구 주석은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를 실시하려는 국제연합에 반대하고 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남북협상을 제창했으나 실패한 뒤 정부수립에 일절 참여하지 않았다.


이승만 박사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는 당선되자마자 자신의 세력을 키우기 위해 임시정부를 말살했고, 반대파를 제거했으며, 공산주의운동을 분쇄했다. 그는 만주와 중국에서 벌어진 무장항일운동에 무지한 데다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다. 민중의 저항에 대한 인식도 없었다. 오로지 친미와 분열, 반민주로 일관했다.


1949년 6월 26일 낮 12시경 안두희 육군 소위가 경교장에서 김구 주석에게 4발의 총탄을 쐈다. 김구는 그 자리에서 순국했고, 안두희는 살해를 지시한 사람을 끝내 말하지 않았다. 그는 서북청년회 총무부장으로 우익활동에 전념했다. 이 사건은 정치적으로 논란이 많았지만 단독범행으로 처리돼 안두희의 종신형으로 마무리됐다. 그러나 그는 석 달 후 15년으로 감형이 됐고,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잔형 집행정지 처분을 받고 포병장교로 복귀했으며, 이후에 대위로 전역했다. 1953년에는 이승만 정권에 의해 완전 복권됐다. 안두희는 강원도 양구에서 군납 공장을 경영하며 안락한 생활을 누렸지만 4.19혁명 이후 김구선생살해 진상규명위원회가 발족하자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잠적했다. 도주 생활 중 잡혀 경찰에 넘겨졌으나 공소시효 소멸로 풀려났고, 곽태영 백범 독서회장으로부터 목에 자상을 입었으나 죽지는 않았다. 1987년 권중희 민족정기 구현회장에게 발각돼서는 몽둥이세례는 물론 암살 배후에 대해 자백하고, 김구 주석의 묘소를 강제 참배하기도 했다. 그때 김구 암살 배후로 지목된 사람은 육군 특무부대장 김창룡이었다. 김창룡은 악랄한 친일파였으며, 이승만의 양자 혹은 오른팔로 불렸다. 그는 1956년 41세의 나이에 이미 부하에게 역사적인 심판을 받았다. 안두희는 1996년 10월 23일 자택에서 박기서에게 피살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