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랜만에 낡은 나무의자에 앉았다. 창밖에는 달이 걸려 있었고, 바람이 얇은 커튼을 흔들었다.
나는 잔을 채웠다. 잔 속에는 술과 함께 가을이 담겨 있었다. 코스모스의 연약함, 해바라기의 끝, 억새의 흔들림, 단풍의 불빛, 낙엽의 바스락임, 은행나무의 고요, 국화의 향기. 그 모든 것이 이 한 잔 안에 있었다. 나는 술잔을 천천히 기울이며 깨달았다. 가을이란 ‘기억의 계절’, 꽃과 나무가 남기는 색이 아니라 사람이 마음에 남긴 향이 가득한 ‘만취의 계절’이라는 사실을.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 속에서 나는 오래도록 눈을 감고 있었다. 가을은 그렇게 그의 안에서 천천히 잠들어갔다.
가을을 사랑했던 남자, 가을에 취했던 남자. 나는 이제 가을을 보내며 뇌리에 박힌 여러 장면들을 이 책에 기록하고 싶었다. 그리고 이 말을 꼭 남기고 싶었다.
“수고했네, 나의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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