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잎은 말라붙고, 꽃잎은 시들기 시작했다.
나는 그 꽃대를 손끝으로 살짝 건드렸다.
꽃잎 하나가 바닥에 뚝 떨어졌다.
그때 예쁜 벌이 날아와 앉아 마지막 꿀을 빨아들였다.
행여나 쫙 벌어진 꽃봉오리가 뚝 떨어질까 봐.
남김없이 마시고 나면, 비로소 빈 잔 속에 제 얼굴이 비친다.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잎들이 바람에 날렸다.
하지만 이미 떨어져 길을 덮은 은행잎은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고 부서졌다.
가을의 끝은 단정함일까? 혹독한 겨울을 대비하는 인내의 시간.

비바람에 은행나무 줄기가 꺾였다.
나는 그제야 곁에 있었던 은행나무를 발견했다.
사람도 그렇다.
비바람이 필요하다.
누군가의 손길이 닿아야 비로소 흔들리며 살아 있음을 느낀다.

은행나무가 고개를 숙였다.
꽃잎들이 바람에 흔들려 떨어질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술잔을 깔끔하게 비웠다.
입안이 싸늘하게 얼얼했다.
마치 늦가을의 공기가 목구멍을 타고 들어오는 듯했다.

잎사귀가 모두 떨어지고, 이제는 앙상한 가지 위에 꽃봉오리만 남아 있었다.
나는 색깔도, 온기도 빠져나가는 꽃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도 참 오래 버틴다, 너는.”

가을이 채워지는 자리에서 ‘비움’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나뭇가지는 앙상했지만 화려함이 사라진 자리에는 묘한 고요가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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