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1. 13. 13:34ㆍ책/단편선
프롤로그 - 아! 가을이었다!
<개그콘서트> ‘심곡파출소’ 코너에 비틀거리며 들어오던 한 여자. 치마는 구겨지고, 머리는 헝클어지고, 두 볼은 불그죽죽하고, 입가에는 이상한 웃음이 걸려 있는 개그우먼 가을이. 그녀는 매번 같은 대사를 외쳤다.
“아! 가을이었다!”
이 대사는 사람들을 웃기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이상하게도 그 안에는 묘한 진심이 있었다. 웃음보다 더 오래 남는 외로움. 서늘하고, 허전한 고독 속에서 느껴지는 따뜻함. 그녀의 비틀거림은 낙엽의 흔들림 같았고, 그녀의 웃음에는 가을바람의 소슬함이 섞여 있었다.
가을은 개그우먼 가을이처럼 늘 그렇게 취한 얼굴을 하고 찾아온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온도로 사람의 마음을 녹이고, 모든 것을 아름답게 물들이다가 결국엔 영영 사라져 버린다.

나는 술을 좋아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술을 핑계 삼아 취하는 시간을 좋아한다. 잔을 기울일 때마다 세상이 조금 느슨해지고, 마음속의 단단한 매듭이 풀려 나가는 그 순간이 좋다. 나에게 술이란 도피이자 귀환이다. 떠나기 위한 것이기도 하고, 제자리로 돌아오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순간은 술이 머리끝까지 차올라 더 이상 마실 수 없을 때다. 그때의 세상은 고요했다. 모든 소리가 잦아들고, 남은 것은 몸속에서 은근히 타오르는 열기뿐. 그것은 마치 단풍이 절정에 다다랐을 때의 풍경과 닮아 있었다.
계절은 하루하루 익어 간다. 낮과 밤의 경계가 바뀌고, 따뜻함과 쓸쓸함이 교차하는 시간에 이른다. 사람들은 그것을 그저 가을이라 부르지만 나는 그것을 만취라고 부른다. 만추가 아닌 만취.
술과 가을은 찰나의 빛남, 만취의 향연이다.
어김없이 술과 키스하는 계절
하늘거리는 코스모스 꽃잎처럼 술은 가벼워야 해.
가을이 오고 겨울로 가는 길목이 이르면 술이 더 당긴다.
여름의 뜨거운 숨결이 가라앉고, 공기 속에 서늘한 바람이 섞일 때.
얼음 결정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면 어김없이 술과 키스한다.
술을 마시기 위해서는 아니라고.
그 술에 담긴 계절의 맛을 느끼고 싶어서라는 핑계를 준비하고서 그냥.

코스모스가 산들바람에 춤쳤다.
마치 누군가의 웃음처럼 가볍게 흔들린다.
저마다의 찬란한 빛을 피워 올리려는 듯.
나는 흔들리는 코스모스를 바라보며 술잔을 들었다.
얇은 잔 속의 술빛이 마치 저 코스모스의 자줏빛과 섞이는 듯했다.
나는 혼잣말을 했다.
“코스모스 담금주는 눈으로 마시는 거야.”

잔 속의 술은 차가웠지만 술을 마시는 나의 가슴속은 따뜻했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술의 맛은 결국 가을의 맛.
가을이 무르익는다는 건, 결국 취해간다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시간에, 기억에, 세상에, 감정에 천천히 젖어가는 것이었다.
나는 술잔을 비웠다.
술잔 바닥에는 꽃잎이 겹겹히 쌓여 있었다.
나는 꽃 향기를 마시듯 술잔을 코끝에 대며 조용히 말했다.
“가을이 내 안에 다 들어오는구나!”

언젠가는 고개 숙일 해바라기
해바라기는 여름의 화신이다.
강렬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태양을 닮은 모습으로 마지막 여름을 불태운다.
하지만 머지않아 곧 고개를 떨굴 것이다.

나는 해바라기를 바라보면서 웃었다.
누구나 같은 시간을 품고 산다.
나에게 가을이 오면 해바라기에게도 가을이 온다.
시간을 이길 장사는 없다.
술 한 잔에 생각이 많아지고, 기억 속의 얼굴들이 하나씩 떠오른다.
아! 내 마음속의 가을인가!

해바라기가 고개를 숙이려고 한다.
한여름의 정열을 다 쏟아낸 해바라기.
이제는 황금빛 머리를 조금씩 떨굴 준비를 하고 있다.
그 모습이 꼭 술에 취해 고개를 숙이는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저 해바라기도 나처럼 점점 취해가는 구나.’

얼근하게 취해 가는 나뭇잎
붉은빛, 주황빛, 은빛이 서로 뒤섞여 번지는 풍경.
마치 잔 속에서 퍼져가는 알코올의 향기처럼 아찔하다.
“가을의 취기란 이런 거지.”

나뭇잎은 떨어져 흙으로 사라졌다.
내 열정도 술잔 아래로 천천히 가라앉아 휘발했다.
무심히 변색해가는 나뭇잎을 바라보며 홀짝홀짝 술을 한 모금씩 마셨다.

낙엽은 하루가 다르게 떨어졌다.
산길을 걸을 때마다 발끝이 바스락거렸다.
그 소리는 술잔에 얼음이 부딪히는 소리와 닮아 있었다.

단풍잎 하나를 주워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그 얇고 가벼운 잎 하나에, 계절의 무게가 고스란히 얹혀 있었다.

단풍이 물들기 시작한 산길을 걸었다.
그때마다 나는 꼭 술에 취한 듯한 착각을 느꼈다.
낙옆에 반사되는 빛은 눈부시게 아름다웠지만 어딘가 쓸쓸했다.
마치 사랑이 끝난 뒤에도 한동안 남는 여운 같았다.
나는 그 빛에 잠시 눈을 감았다.

은빛으로 대지를 물들이는 억새
시간이 흐를수록 가을은 점점 더 짙어졌다.
강가 언덕에 서 있던 억새들이 햇빛을 머금고 은빛으로 반짝였다.
투명하게 흔들리는 술잔처럼.

억새의 흔들림을 보면서 오래전 가을의 기억을 떠올렸다.
젊은 시절 사랑하던 사람과 억새밭을 걸으며 하늘을 올려다보던 날.
그날의 바람은 아직도 내 머리카락 사이를 스친다.

바람이 불 때마다 머릿속은 점점 조용해졌다.
이름은 잊혔지만억새의 향기만큼은 잊히지 않았다.
가을 억새는 어둠 속에서도 흰빛으로 피어나며 나를 물들인다.

나는 작은 술병을 들고 억새밭을 걸었다.
술을 마시려는 것도, 기억해내려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이 순간 무언가와 함께 있고 싶었다.
한 잔, 두 잔. 천천히 술을 마였다.
입안에 남는 알싸한 술 향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 가슴께에서 묘하게 돌았다.
그것은 가을의 냄새와 비슷했다.
볕이 조금 기울고, 억새가 말라 부서졌다.
그때 나는 그 특유의 향기.
삶이 한 계절의 끝자락에 이르러 자신을 태워내는 냄새.

결실을 맺는 인고의 시간
가을이 깊어갈수록 세상의 빛은 요란스럽다.
단풍은 노랗고, 검붉게 변하며 세상에 스며든다.
낙엽은 발자국 아래 부서지며 인고의 소리를 냈다.

가을 햇빛을 받아 금빛으로 물들어가는 몸빛.
가을의 끝에는 결실이 있었다.
나는 그 순간 마시던 술이 한결 부드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시간은 쓸쓸히 흘러가는 것 같지만 값진 맛을 낸다.
가을 끝에는 하늘도 핀다.
찬바람에도 움츠려들지 않고, 묵묵히 마지막 빛깔을 발산한다.

가을이라는 계절.
바람과 냄새 그리고 햇빛과 함께한 것은 삶의 빈 공간을 채운 인간의 지혜였다.
바람이 옷자락을 스쳤다.
가을은 바람을 느껴야만 제 몸을 드러낸다.
느끼지 않으면, 가을은 그저 잿빛 시간에 지나지 않는다.
누군가의 노동 현장은 하늘에 더 가까이 있다.

빗물마저 익어 가는 가을
며칠째 비가 내렸다.
안개에 가까운, 가늘고 부드러운 가랑비가 거리를 적셨다.
국화는 그 물기 가운데서도 향기를 내뿜었다.
나는 국화꽃 앞에서 발길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가을이 깊어질수록 나는 점점 더 자주 잔을 들었다.
바람이 한결 서늘해졌다.
나무들이 저마다의 빛깔을 지닌 채 마지막 불꽃을 피워 올릴 즈음.
내 손끝에는 언제나 투명한 잔이 놓여 있었다.
술이든 가을이든 둘 다 시간이 익어야 제 맛이 나는 것이라고 나는 믿었다.
비에 젖은 노란 낙엽을 보면서 가슴이 적적했던 걸까?
비둘기는 나무 아래를 지날 때마다 잠시 멈춰 서곤 했다.
나도 술기운이 노랗고 축축하게 마음을 뒤흔들어 잠시 숨을 골라야 했다.

풍채 좋은 가을 것들
햇빛을 반사하는 붉은 빛. 김장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말라가는 고추를 바라보며 문득 생각했다.
“세상의 모든 열정도 결국 마지막에는 익고 익어 노화되는 거야.”

고추 말리는 농심.

한때 태양을 바라보며 거만하게 굴던 밤송이.
얼마 후면 몸이 반쪽으로 갈라지며 자기 그림자를 바라보는 시간을 갖게 된다.
나는 그 모습에서 중년의 나이에 이른 나를 본다.

비움을 위한 인고의 시간
잎은 말라붙고, 꽃잎은 시들기 시작했다.
나는 그 꽃대를 손끝으로 살짝 건드렸다.
꽃잎 하나가 바닥에 뚝 떨어졌다.
그때 예쁜 벌이 날아와 앉아 마지막 꿀을 빨아들였다.
행여나 쫙 벌어진 꽃봉오리가 뚝 떨어질까 봐.
남김없이 마시고 나면, 비로소 빈 잔 속에 제 얼굴이 비친다.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잎들이 바람에 날렸다.
이미 떨어져 길을 덮은 은행잎은 흔들리지 않고 부서졌다.
가을의 끝은 단정함일까?
혹독한 겨울을 대비하는 인내의 시간.

비바람에 은행나무 줄기가 꺾였다.
나는 그제야 곁에 있었던 은행나무를 발견했다.
사람도 그렇다.
비바람이 필요하다.
누군가의 손길이 닿아야 비로소 흔들리며 살아 있음을 느낀다.

은행나무가 고개를 숙였다.
꽃잎들이 바람에 흔들려 떨어질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술잔을 깔끔하게 비웠다.
입안이 싸늘하게 얼얼했다.
마치 늦가을의 공기가 목구멍을 타고 들어오는 듯했다.

잎사귀가 모두 떨어졌다.
이제는 앙상한 가지 위에 꽃봉오리만 남아 있었다.
나는 색깔도, 온기도 빠져나가는 꽃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도 참 오래 버틴다, 너는.”

가을이 채워지는 자리에서 ‘비움’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나뭇가지는 앙상했지만 화려함이 사라진 자리에는 묘한 고요가 남았다.

잊힌 사람들이 떠오르는 날
세상은 갑자기 밝아진다.
거리를 가득 채운 설렘, 반짝이는 시골집의 등불, TV에서 방송되는 익숙한 명화.
그런 풍경 속에서 괜히 마음이 들뜨는 내 자신을 발견한다.
거기 아쿠아리움에서마저도.
‘아! 가을에는 한가위가 있지!’

한가위에는 미소가 번지지만 동시에 가슴 한편이 무겁다.
자리에 앉아 잔을 가득 채운다.
자주 만나지 못한 사람들의 얼굴이 술잔 속에서 한꺼번에 떠오른다.
잊을 수 없는 슬픔의 순간까지 모두.

명절은 사람들에게 기쁨과 쓸쓸함을 동시에 선사하는 시간이다.
나 또한 마찬가지.
그래서 나는 술을 마신다.
술을 마시면 기쁨도, 쓸쓸함도 한꺼번에 입안에서 섞인다.
세상은 조금은 견딜 만한 곳으로 변한다.

입으로 들어오는 계절, 김장
가을이 깊어지면, 집 안은 늘 분주해진다.
무거운 배추가 쌓인 포대. 굵은 무와 갓, 마늘과 고춧가루가 들어 있는 바구니들.
그 모든 것이 곧 한 계절을 담은 향기와 색으로 집 안으로 들어온다.
김장은 단순한 저장의 행위가 아니다.
그 안에는 시간을 붙잡아 두려는 마음, 가족과 이웃을 생각하는 정성이 있다.
지나온 계절의 기억도 함께 담겨 있다.

아름다운 김장떼.

겹겹이 쌓이는 환희
세계불꽃축제가 열리는 늦가을.
밤하늘이 검게 내려앉으면 사람들은 한강 둔치에 모인다.
기대와 설렘이 묻어난 얼굴로 손에는 간식과 담요, 카메라를 들었다.
모두 숨을 죽인다.
첫 불꽃이 터질 때를 기다리며.

작은 빛이 어둠 속에서 폭발하며 퍼진다.
그 순간 하늘은 온통 색으로 가득 찬다.
붉고, 노랗고, 파랗고, 녹색의 빛이 번진다.
그 빛은 금세 사라지지만, 마음 속에는 오래도록 잔향이 남는다.

불꽃놀이는 단순한 구경거리가 아니다.
그 속에는 순간의 감동과 사람의 마음이 겹겹이 쌓인다.
아이들은 손뼉을 치며 환호하고, 연인들은 서로의 손을 잡는다.
노인들은 추억을 떠올리듯 조용히 웃는다.

짧은 폭발 속에서 느낀 감동, 순간이 지나간 자리에서 울리는 마음의 떨림.
그 모든 것이 가슴속에서 동시에 반짝인다.
나는 다시 잔을 채웠다.
불꽃이 술잔에 비쳐 은은히 흔들렸다.
바람은 조금 더 차가워졌지만 속은 오히려 더 따뜻했다.

마지막 불꽃이 하늘을 가르고, 모든 빛이 사라진 후에도 나는 눈을 감았다.
불꽃놀이는 결국 삶과 닮아 있다.
순간은 짧고, 화려하지만 사라지고 나면 남는 건 기억뿐.
그 기억 속에서 사람들은 웃고, 눈물 흘리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마음속에 여전히 그 빛을 간직한 채로.

만추, 겨울 길목에서
낙엽이 바람에 휩쓸려 차창 위로 쌓였다.
나는 그것을 걷어내지 않았다.
그냥 그대로 두었다.
그 낙엽들이 마치 오랜 세월의 잔재 같아서다.
인생도 결국 자신이 흩어질 자리를 찾아가는 거다.

날이 몹시 추웠던 어느 가을날.
찬바람을 정면으로 맞은 단풍이 고개를 세운 채 븕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단풍을 보면서 술을 천천히 마셨다.
목을 타고 내려가는 그 따스함이 꼭 붉은 빛과 섞이는 듯했다.
나는 중얼거렸다.
“가을의 끝에는 결국 낙엽이 남는구나. 스러지는 법을 아는 것들이 마지막에.”

꽃잎이 다 지지 않았지만, 그 자리에서 얼음 냄새가 났다.
비에 젖은 땅, 낙엽이 썩어가는 냄새를 뚫고 생의 마지막이자 새로운 계절의 시작을 알리는 향기.
나는 그것을 ‘익음’이라고 부르고 싶었다.
가을이 익듯이 사람도 결국 그렇게 익어가는 것이라고.

젊을 때는 불타오르다 사라지지만 나이를 먹으면 천천히 스며든다.
가을은 그 느림을 사랑하고 느림의 끝은 만취다.
나는 술잔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가을이란 술에 취하는 계절이지.”

비로소 가을이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찬바람이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한때 그 바람 속에는 단풍 냄새가 섞여 있었는데 이제는 그 향이 거의 사라졌다.
대신 맑고 비어 있는 냄새가 있었다.
나는 그 냄새를 깊게 들이마셨다.
술보다 깨끗했고, 술보다 오래 남는 향기였다.

에필로그 - 가을에 취하다
오랜만에 낡은 나무의자에 앉았다. 창밖에는 달이 걸려 있었고, 바람이 얇은 커튼을 흔들었다.
나는 잔을 채웠다. 잔 속에는 술과 함께 가을이 담겨 있었다. 코스모스의 연약함, 해바라기의 끝, 억새의 흔들림, 단풍의 불빛, 낙엽의 바스락임, 은행나무의 고요, 국화의 향기. 그 모든 것이 이 한 잔 안에 있었다. 나는 술잔을 천천히 기울이며 깨달았다. 가을이란 ‘기억의 계절’, 꽃과 나무가 남기는 색이 아니라 사람이 마음에 남긴 향이 가득한 ‘만취의 계절’이라는 사실을.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 속에서 나는 오래도록 눈을 감고 있었다. 가을은 그렇게 그의 안에서 천천히 잠들어갔다.
가을을 사랑했던 남자, 가을에 취했던 남자. 나는 이제 가을을 보내며 뇌리에 박힌 여러 장면들을 이 책에 기록하고 싶었다. 그리고 이 말을 꼭 남기고 싶었다.
“수고했네, 나의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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