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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만취

프롤로그 - 만추가 아닌 만취, 가을에 취하다

 

 

<개그콘서트> ‘심곡파출소’ 코너에 비틀거리며 들어오던 한 여자. 치마는 구겨지고, 머리는 헝클어지고, 두 볼은 불그죽죽하고, 입가에는 이상한 웃음이 걸려 있는 개그우먼 가을이. 그녀는 매번 같은 대사를 외쳤다.


“아! 가을이었다!”


이 대사는 사람들을 웃기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이상하게도 그 안에는 묘한 진심이 있었다. 웃음보다 더 오래 남는 외로움. 서늘하고, 허전한 고독 속에서 느껴지는 따뜻함. 그녀의 비틀거림은 낙엽의 흔들림 같았고, 그녀의 웃음에는 가을바람의 소슬함이 섞여 있었다.


가을은 개그우먼 가을이처럼 늘 그렇게 취한 얼굴을 하고 찾아온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온도로 사람의 마음을 녹이고, 모든 것을 아름답게 물들이다가 결국엔 영영 사라져 버린다.


나는 술을 좋아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술을 핑계 삼아 취하는 시간을 좋아한다. 잔을 기울일 때마다 세상이 조금 느슨해지고, 마음속의 단단한 매듭이 풀려 나가는 그 순간이 좋다. 나에게 술이란 도피이자 귀환이다. 떠나기 위한 것이기도 하고, 제자리로 돌아오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순간은 술이 머리끝까지 차올라 더 이상 마실 수 없을 때다. 그때의 세상은 고요했다. 모든 소리가 잦아들고, 남은 것은 몸속에서 은근히 타오르는 열기뿐. 그것은 마치 단풍이 절정에 다다랐을 때의 풍경과 닮아 있었다..


계절은 하루하루 익어 간다. 낮과 밤의 경계가 바뀌고, 따뜻함과 쓸쓸함이 교차하는 시간에 이른다. 사람들은 그것을 그저 가을이라 부르지만 나는 그것을 만취라고 부른다. 만추가 아닌 만취.


술과 가을은 찰나의 빛남, 만취의 향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