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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내가 만난 사람

최민화 화가 - 리얼리티를 견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최민화와 그의 작품들

 

최민화 작가는 술을 무척 좋아했다. 인터뷰 약속이 잡힌 날도 과음해 불그레한 얼굴로 나타났던 그의 모습이 생각난다. 그는 “술 취해 돌아다니면 노숙자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술에 취하면 다 잃어버리기 때문에 핸드폰도 없고, 아무것도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며 웃어버렸다.

 

웃고 있는 그의 얼굴에는 그늘이 있었다. 삭막한 자본주의 사회에 살려면 어느 정도의 그늘은 드리워져 있어야 정상이겠지만 그의 얼굴에는 그늘의 양이 상당했다. 그늘의 정체는 1980년대를 겪었던 시대의식과 앞으로 그려 낼 작품에 대한 소명의식이었다.

 

최민화 작가의 본명은 최철환(崔哲煥)이다. ‘민화’라는 이름은 ‘들꽃’ 혹은 ‘민중은 꽃’이라는 의미로 지은 예명이다.

 

최 작가는 민족미술협회 사무국장으로 활동하면서 1987년 이한열 열사 장례식 때 사용한 대형 걸개그림 ‘그대 뜬 눈으로’를 그렸다. 이 그림은 6월 항쟁 당시 세종로 가두 투쟁의 선봉에 섰지만, 다연발최루탄을 쏘는 향차에 무참히 짓밟히고 말았다.

 

최 작가는 민미협에 들어간 이유를 “전두환을 몰아내려고”라고 말했다. 화가 이전에 젊은이였고, 광주학살을 목도하면서 분노했으며, 정치투쟁을 하려면 조직의 힘이 필요했기 때문이란다.

 

그는 1992년부터 6월 항쟁에 관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과연 지나간 사실들을 지금에 와서 그리는 것이 유의미한 일인지” 고민했지만 그래도 남겨야지라는 생각으로 6월 항쟁을 재현하는 일에 몰두했다. 잊힌 과거를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되돌아보자는 마음이었다.

 

아울러 네이팜탄 폭격으로 벌거벗은 채로 울부짖는 베트남 소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혀 있는 유대인들, 마오쩌둥의 상하이 진격으로 은행 앞에 줄을 선 사람들 등 세계사의 격동적인 장면도 함께 그려냈다. 과거의 전쟁이 만들어낸 비극을 통해 아직도 종식되지 않고 강대국의 주도하에 벌어지는 동시대의 아픔을 끄집어내기 위해서다.

 

그는 그때 이런 말을 했었다. “9.11사태가 과거의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본질은 미제국주의에 있기 때문에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고 전쟁도 계속되고 있다. 우리 시대는 도처에 널린 과거의 거대한 모순들을 다시 현재로 끄집어낼 것을 화가들에게 요구한다. 내가 한국미술의 방향을 얘기할 자격이 있다면 리얼리티를 견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시간 속으로Ⅰ. 유화, 131×162cmⓒ최민화

 

어느 무명 청년의 죽음Ⅰ. 유화, 136×74cm, 1999ⓒ최민화

 

고문. 유화, 136×126cm, 1993ⓒ최민화

 

불법연행. 유화, 136×206cm, 1998ⓒ최민화

 

김민화는 화집 <분홍>을 발간하고, 책 발간을 기념하는 ‘에스키스’전을 나무화랑에서 열었다. (에스키스는 작품구상을 위해 사전에 그리는 밑그림 혹은 작은 크기로 먼저 그린 그림을 말한다.) 하지만 전시장에서 그를 만나지 못했다. 들리는 얘기로는 몸이 좋지 않아 두문분출 중이란다. 생각해 보니 2007년 6월 항쟁 20주년을 기념하는 ‘역사적 울혈증과 회화적 기억’전에서 만난 이후 그를 보지 못했다.

 

최민화 작가의 예스키스는 전작들과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컬러도 그랬지만 인물도 한국인의 골격이 아니었고, 구성도 이국적이고 고전적인 느낌을 줬다. 마치 인도나 물이 귀한 중동 지역의 사람을 그려놓은 것 같았다. 하지만 전시 제목은 ‘조선적인, 너무나 조선적인’으로 역설적이었다. 조선이 아닌데 너무나 조선 같다는 표현은 조선이 과거의 조선이 아니라는 것으로 읽혔다.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 동물, 사물과 다르게 배경만은 한국적으로 형상화한 것도 그런 의미겠다.

 

최 작가의 에스키스는 향후 어떤 내용의 작품이 발표될지 예측 가능하도록 했다. 외세의 영향에 좌지우지되며 정체성과 자존감을 잃어가는 한국 청년이나 우리 사회에 일종의 각성을 촉구하는 그림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었다.

 

 

최민화 작가의 '조선적인, 너무나 조선적인' 에스키스전 풍경ⓒ민중의소리

 

최민화 작가의 '조선적인, 너무나 조선적인' 에스키스전 풍경ⓒ민중의소리

 

2017년 6월 대안공간 루프에서 6.10 민주 항쟁 30주년을 기념하는 ‘최민화 전’이 열렸다. 이 전시의 제목은 ‘모든 회상은 불륜이다. 망각은 학살만큼 본질적이므로’였다. 2007년에 열렸던 ‘민주항쟁 20주년 최민화 전’에서 선보인 작품 중 50개의 이미지로 6월 항쟁의 역사를 재구성해 현재를 성찰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했다.

 

그리고 2020년 갤러리현대에서 최민화 개인전 ‘Once Upon a Time’전이 열렸다. 이번 전시에서 그는 2018년 ‘이인성 미술상’을 수상한 이후 상업갤러리에서 처음으로 60여 점의 회화, 40여 점의 드로잉과 에스키스를 선보였다. 나무화랑의 ‘에스키스’전에서 봤던 그림이 떠오르는 작품이었다.

 

화풍은 그동안 봐왔던 것과 많이 달랐다. ‘신과 인간 사이의 소통을 회화적으로 가장 밀접하게 풀어냈다’는 작가의 말처럼 풍성한 구상을 부드럽고 엷은 세필로 윤곽선을 표현해 아련한 느낌을 자아냈다. 내용은 민화나 불화, 힌두 미술, 풍속화, 르네상스 미술 등을 혼합해 빚어냈다.

 

‘Once Upon a Time’전은 최민화 작가의 다채로운 구상회화를 관람하는 기회였고, 한국 정통 구상회화의 잠재력 확인할 수 있는 전시였다. 앞으로 그가 또 어떤 작품으로 관람객을 불러 모을지 벌써부터 기대된다.

 

 

Whanwoong, a Son of Heaven, Comes Down to Sinsi, the City of God 천제환웅 – 신시에 오다 2018, Oil on canvas, 97 × 130.3 cm

 

Hyeokgeose of Alyoung 알영 - 혁거세 Oil on canvas, 130.3 x 97 cm

 

Tiger Woman 호녀 2020, Oil on canvas, 90.9 × 72.7 c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