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내가 만난 사람

이정훈 시인 - 스스로를 향한 진혼곡 ‘쏘가리, 호랑이’

이동권 2022. 10. 3. 20:48

이정훈 시인

밀란 쿤데라는 ‘시인이 된다는 것’은 ‘끝까지 가보는 것’이라고 했다. 시인은 ‘행동, 희망, 열정, 절망의 끝까지 가본 뒤 그다음 처음으로 셈을 해보는 것’이지, 그 전에는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했다. 그 이유에 대해 그는 ‘삶이라는 셈이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낮게 계산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속담처럼 배움과 경험, 진심과 성찰이 담겨 있지 않고 머리로 만들어낸 시는 인간에게 해를 끼친다는 얘기다.

 

밀란 쿤데라를 좋아하지 않지만 시인에 대한 그의 통찰만은 마음에 든다. 정말 아무나 시인이 못 된다. 시를 쓰는 일, 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가.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수상작으로 이정훈의 시 ‘쏘가리, 호랑이’가 당선됐다. 이 시는 나에게 특별한 시정(詩情)을 선사했다. 시에서 시인의 역사가 읽히고, 시어(詩語)들이 이미지로 그려졌다. 이러한 회화적인 요소들은 숨겨진 감각을 일깨웠고, 상상력을 자극했다. 아울러 그의 시는 거칠고 남성적이지만 가슴 한 구석에 애잔한 감성을 자아냈다. 시인의 가슴속에 맺힌 응어리가 무엇이기에, 이토록 격렬하게 ‘핏줄’을 사색하게 됐을까 궁금해졌다.

“마흔 무렵 어디에도 부려놓을 데 없는 허탈감으로 잠 못 이루는 날이 찾아왔습니다. 인생의 고갯마루 같은 게 느껴졌는데 물도 바람도 전과 다 달랐습니다. 앉아 생각하길 아, 내가 어쩌면 아버지만큼도 못 살게 되겠구나, 그날부터 아버지의 삶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고 할아버지, 아버지 그리고 내게로 이어져 온 좌절과 패배의 끈질긴 족보 같은 게 떠올랐습니다. 내 핏줄 속을 휘젓고 다니는 범을 닮은 물고기 한 마리가 젊은 아버지의 울분과 큰아버지의 죽음에 닿아있다는 걸 깨닫고 나서야 몸과 마음이 평온해졌습니다. 실패와 패잔의 리허설을 보았다고 해야 하나요. 아버지가 제게 가르친 게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작살을 들고 물속에 들어가 고기를 찌르는 것이고 다른 하나가 운전입니다. 이제 운전은 제 생업이 되었고 쏘가리, 호랑이는 내 작살에 죽은 수천의 물고기들과 스스로를 향한 진혼곡 정도가 되겠지요. 신화적이고 환상적이라고들 하지만 제게는 전혀 그렇게 느껴지질 않습니다.”

이정훈 당선자는 20년간 트레일러를 운전해왔다. 현재 그는 영월의 공장단지에서 전국 각지 레미콘 공장으로 시멘트를 옮기는 일을 하고 있다. 그는 당선 소감에 “별다른 소감이랄 게 없고 그저 뒤통수 벅벅”이라며 “쑥스럽고 잘 믿어지지 않고 지금도 실감이 나질 않는다”고 말했다. ‘쏘가리, 호랑이’, 그의 시를 따라 그의 삶 속으로 들어가 보자.

쏘가리, 호랑이

나는 가끔 생각한다
범들이 강물 속에 살고 있는 거라고
범이 되고 싶었던 큰아버지는 얼룩얼룩한 가죽에 쇠촉 자국만 남아
집으로 돌아오진 못하고 병창 아래 엎드려 있는 거라고
할애비는 밤마다 마당귀를 단단히 여몄다
아버지는 굴속 같은 고라댕이가 싫다고 산등강으로만 쏘다니다
생각나면 손가락만 하나씩 잘라먹고 날 뱉어냈다
우두둑, 소리에 앞 병창 귀퉁이가 와지끈 무너져 내렸고
손가락 세 개를 깨물어 먹고서야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갔다
아버지가 밟고 다니던 병창 아래서 작살을 간다
바위너덜마다 사슴 떼가 몰려나와 청태를 뜯고
멧돼지, 곰이 덜걱덜걱 나뭇등걸 파헤치는 소리
내가 작살을 움켜쥐어 물속 산맥을 타넘으면
덩굴무늬 우수리 범이 가장 연한 물살을 꼬리에 말아 따라오고
내가 들판을 걸어가면
구름무늬 조선표범이 가장 깊은 바람을 부레에 감춰 끝없이 달려가고
수염이 났었을라나 큰아버지는,
덤불에서 장과를 주워먹고 동굴 속 낙엽잠이 들 때마다
내 송곳니는 점점 날카로워지고
짐승이 피를 몸에 바를 때마다
나는 하루하루 집을 잊고 아버지를 잊었다
벼락에 부러진 거대한 사스레나무 아래
저 물 밖 인간의 나라를 파묻어 버렸을 때
별과 별 사이 가득한 이끼가 내 눈의 흰창을 지우고
등줄기 가득 가시가 돋아났다 심장이 둘로 갈려져,
아가미 양쪽에서, 퍼덕,
거,리,기,시,작,했,다
산과 산 사이
沼와 여울, 여울과 沼가 끊일 듯 끊일 듯 흘러간다
坐向 한번 틀지 않고 수 십 대를 버티는 일가붙이들
지붕과 지붕이 툭툭 불거진 저 산 줄기줄기
큰아버지가 살고 할애비가 살고
해 지는 병창 바위처마에 걸터앉으면
언제나 아버지의 없는 손가락, 나는

이정훈은 강원도 평창군 평창읍에서 십리쯤을 더 들어간 산골짝에서 태어났다. 그가 여덟 살 되던 해 아버지가 홍제동 언덕배기에 낡은 한옥 한 채를 장만해서 육 남매를 모두 유학시켰으니, 집안 사정이 그리 어려운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서울을 좋아하지 않았다. 지금도 서울이 얼마나 싫은지, 자신이 태어난 강원도 그 어느 산골을 ‘낙원(樂園)’이라고 표현했다. 이제는 정식 시인이 됐지만, 정말 시인 같은 표현이 아닐 수 없다. ‘낙원’.

“서울에 올라와 처음 마신 수돗물의 맛을 잊지 못합니다. 진흙과 석유 냄새가 났습니다. 칠십사 년이었고 봄이었지요. 여름방학을 기다리며 봄을 보냈고 다시 겨울방학을 기다리느라 가을이 갔지요. 방학 책을 받자마자 지금은 없어진 마장동 시외버스 터미널로 달려가 평창으로 가는 버스에 오르곤 했는데 방학 내내 강과 산을 쏘다녔습니다.”

그는 학창 시절에 특별하게 시를 좋아하지는 않았다. 초등학교 중학교 때는 세계명작과 만화책을 좋아했고, 독서에 어떤 취향이라고 부를 만한 게 생긴 건 고등학교 입학 후였다.

“이현세의 국경의 갈가마귀나 공포의 외인구단에서 폴폴 풍기던 비극미, 절규성 같은 게 어린 마음에 밀가루처럼 내려앉았다고 해야 하나. 만화방 구석에서 책으로 얼굴 가리고 훌쩍거리던 기억이 아, 지금 생각해도 또 가리고 싶네요. 국민학교 땐 루벤스의 성화 아래 개목을 끌어안고 얼어 죽던 네로가 절 울렸는데 이들이 제 감수성의 방향을 결정지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지극히 평범했지요.”

그에게도 사춘기가 왔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사춘기의 ‘열병’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러나 가끔 특별한 방황을 한 청춘도 있고, 불혹의 나이를 지나서까지 사춘기를 앓는 사람도 드물게 있다. 그가 바로 그러하다. 그는 고등학교 일 학년 때 ‘오혜성’이나 ‘지하에서 칼을 가는 무사’가 되고 싶어 지각을 밥 먹듯 했고, 꼴찌가 하고 싶어 안달이 났다. 하지만 이듬해 그는 달라졌다.

“2학년 여름에 정독도서관엘 갔다가 우연찮게 이병주의 지리산을 집어 들었는데 기말고사 기간에 일곱 권을 다 봤어요. 결심했지요. 아, 공부라도 해야 되겠구나. 빨치산이 되고 싶은 욕구를 공부로 승화시켰다고나 할까. 물론 기말고사는 망쳤지만 덕분에 대학은 갈 수 있었습니다.”

그는 사춘기를 지나면서 조숙하다 싶을 정도로 세상에 관심을 많이 갖게 됐다.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게 있다면 ‘눈물이 많다’는 것이다.

“광주항쟁 비디오를 보며 식당 구석에서 울었고 그걸 또 왜 하필 식당에다 틀어놨는지. 어느 돌멩이의 외침(전태일 평전)은 잠 못 드는 밤을 울게 만들었고. 어째 울다가 보낸 사춘기 같은데 그때 눈물은 내 의사와는 무관한 무슨 자기결정권 같은 걸 갖고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사방에서 돌이 날아오던’ 때였고 내가 던진 짱돌이 날아가는 쪽엔 적이 있다는 신념으로 살았지요. 능력 안 되는 팔뚝에 의욕만 가득하면 앞사람 뒤통수가 깨진다는 걸 안 건 한참 나중의 일이고. 사실은 지금도 사춘기지요.”

이정훈은 첫 사회생활을 마을버스 운전으로 시작했다. 이후 그는 트레일러 운전을 배워 20년간 한 우물을 팠다. 하지만 20년의 세월에도 변하지 않은 것은 노동현장이었다. 아니, 현장은 더 열악해졌고, 사측은 더 악랄해졌다.

“승차요금 100원 할 때 15분에 동네 한 바퀴를 도는 마을버스부터 시작했습니다. 이왕 하려면 큰 놈으로 하자 싶어서 트레일러 운전을 배웠는데 그게 94년인가 5년인가. 기억나는 건 경유가 삼백 얼마쯤. 휘발유가 5백 몇십 원 하던 시절이었는데 기사 월급이 100만 원 좀 넘었지요. 대졸 초임이 60~70만 원이었으니 괜찮은 편이었어요. 물론 노동 강도는 무척 셌지요. 그땐 8할이 월급기사였고 지금은 8할이 개인차주가 되었는데, 비정규직 문제가 다 그렇지만 화물 시장만큼 자본의 요구가 적나라하게 관철된 곳이 없지요. 고유가, 차량 가격을 포함한 물가 인상분을 고스란히 화물노동자들이 떠안는 방향으로 시장이 재편된 게 지난 20년 동안 제가 목격한 것입니다. 거기에 이제는 국가에서 발급한 번호판을 운수회사에 돈을 주고 사야 합니다. 영수증 발급도 없는 돈이지요. 기름 값이 5배 6배 올랐는데 운반비는 20년 전과 거의 차이가 없습니다. 어떻게 먹고사는지 수수께끼입니다. 풀 길이 없지요. 물론 더 큰 수수께끼는 따로 있지만.”

그는 화물연대 노동조합에 가입했다. 특별한 계기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주위의 밥고문과 술고문에 이기지 못해서였다. 그는 “주변의 나이 많은 형아들 나이 적은 형님들의 애정과 애무가 마음에 사무쳐 가입했다고 해야 하나”라며 멋쩍게 웃어버렸다. 하지만 그 역시 사측의 끊임없는 부당한 처우에, 마음은 분노로 가득한 상태였다. 이제는 이골이 났다고 해야 할까.

“파업 땐 개 소 말 닭 찾다가도 끝나면 사장님, 부장님 이러면서 또 잘 지냅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처음도 마지막도 아닐 거란 생각이 사람을 뻔뻔하게 만들더군요. 이젠 스스로의 뻔뻔함을 사랑하게 됐습니다. 물론 수틀리면 또 틀어막겠지요. 인생 별 거 있나요."

트레일러 운전만 20년을 했던 이정훈이 시를 쓰게 됐다.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

“그냥… 내가 세상의 모퉁이에서 마음 다쳐 울고 싶을 때 이게 아닌데, 아닌데 하면서도 생활에 지쳐 몸 추스를 엄두가 나지 않을 때 방학 날 귀향하던 기분으로 글을 쓰게 됩니다. 사진으로도 찍을 수 없고 그림으로도 남길 수 없는 어떤 풍경이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데 설핏 잠에서 깨어보면 지나간 산 뒤로 마을이 흐려지고 저녁 강물에 어스름이 내립니다. 그러다 차에서 내리면 돌아가신 할아버지 할머니가 참외 하나를 깎아 내밀기도 하고…. 그럼 내 머릿속에 온전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모든 것들이 살아있으라, 살아서, 남아라, 타이르는 것 같습니다. 일종의 몽유(夢遊) 같은 거죠.”

시는 시간이 많다고 써지는 게 아니다. 시는 사색의 결정체이기 때문에 마음속에서 ‘아’라는 탄성이 터져 나와야 써지게 된다. 아울러 그는 전업 작가가 아니기에 일도 해야 한다. 목구멍이 포도청 아닌가. 시 쓰는 일, 쉽지 않다.

“일과 중에 시를 쓴다는 건 말이 안 되고…. 나이 든 할마씨와 시 쓰는 사람에게 꼭 필요한 게 ‘영감’이라고 하는데 이건 한 단어나 한 줄 문장을 타고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영감님 오셨다 싶으면 녹음을 하거나 메모를 해둡니다. 일이 끝나고 운행일보 정리할 때 몇 줄 보충해 두는 경우도 있고…. 제가 하는 일이 벌크 시멘트를 레미콘공장에 운송하는 것인데 일의 특성상 여름 장마와 겨울 혹한기엔 상대적으로 한가해집니다. 그때 정리할 시간을 갖게 되지요.”

그는 앞으로 노동자로서, 시인으로서 어떤 계획을 세우고 있을까? 예상하건데 그는 아주 지루한 투쟁과 평범한 일상에서 시어를 건져내는 시간을 보낼 것 같다.

“어째 나이가 들수록 인생이 점점 어설퍼지는지 모르겠습니다. 노동자로서 시인이 되어야 하는지 시인으로서 노동을 해야 하는지…. 노동이야 늙어 죽기 전까진 해야 하는 거고…. 내 시가 내 눈에서 멀어져 나도 못 알아보는 물건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고등교육-아, 고등학교 교육을 말합니다-을 받은 사람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설혹 이해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분위기를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는, 그런 시를 쓰게 되겠지요. 쓸 것도 없는데, 쓸 만한 것도 아닌데, 귀한 종이 낭비하는 시인은 되지 않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