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2 - 장준하 일대기 078. 진드기와의 활극 - 설경의 은세계

2026. 8. 25. 18:21ㆍ책/칼로 새긴 장준하

크리스마스였다. 첩첩산중에서 캐럴을 들을 수 없겠지만 화이트 크리스마스 분위기는 한껏 났다. 천지를 뒤덮은 설경은 성탄절을 맞은 기쁨을 대신 전해주는 듯했다. 저녁마다 따뜻한 음식을 먹고 추위를 피할 수 있는 곳에서 잠을 자는 데다 낮에만 걷는 일정이어서 피로도 많지 않았다. 정말로 경치도 아름답고, 발걸음도 활기차고, 기분도 좋은 행군이었다.


장준하 일행을 다시 극심한 고통으로 내몬 건 옴이었다. 주막 헛간에서 나뭇단을 깔고 자다 진드기에 물어뜯기면서 일행 대부분이 옴에 올랐다. 일행은 행군하는 동안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긁었다. 살아 있는 진드기들이 몸을 기어 다니며 물어대는 통에 따끔따끔한 통증을 느꼈다. 고통이 심한 이들은 발가벗고 옷을 뒤집어 탈탈 털었다. 진드기들은 옷을 몇 번 털지 않았는데도 하얀 눈 위로 후드득 떨어졌다. 날씨가 얼마나 추운지 바닥에 떨어진 진드기들은 곧바로 얼어 죽었다.


한두 명으로 시작된 옷 털기는 전염병처럼 순식간에 일행들에게 전파됐다. 살을 에는 바람이 몰아치고, 새하얀 눈이 하염없이 쏟아질 때에도 가려움을 참지 못하고 아무 데서나 옷을 홀라당 벗고 진드기를 털어냈다. 일행들은 주막 헛간에서 잘 때도 알몸이 돼 유황 돼지기름을 몸에 발랐다. 손이 닿지 않은 곳은 서로서로 상부상조했다. 그러나 진드기들은 두꺼운 옷 속에 파고들어 가 있어 여간 힘차게 털어내지 않으면 떨어지지 않았고, 그중 살아남은 진드기들은 충칭에 가기 전까지 끝끝내 일행을 괴롭혔다.


유난히 어두침침한 아침이었다. 새벽의 상쾌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장준하 일행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행군을 멈출 순 없었다. 점심으로 먹을 밀가루빵을 싸들고 서둘러 길을 나섰다. 파촉령 꼭대기로 갈수록 날씨는 더욱 나빴다. 지형도 험준했고, 분위기도 칙칙했다. 오르면 오를수록 경사도 심했으며, 바닥은 단단한 얼음 천지였다. 순식간에 해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점점 날은 어두워지는데 주막은 보이지 않았다. 장준하는 고개 너머로 사라지는 태양을 바라보면서 마음이 점점 급해졌다. 태양은 목숨과 같은 것이었다. 이런 바위고개를 넘다 태양이 사라지면 혹독한 시련과 마주해야 했다. 혼자 간다고 될 일은 아니었다. 일행들과 보조를 맞춰 나가야 사고 없이 다음 주막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주막은 나타나질 않았다. 그는 따뜻한 저녁식사와 잠자리가 무척이나 그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