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8. 25. 18:18ㆍ책/칼로 새긴 장준하
장준하는 몸에 힘이 빠지며 아무런 생각도, 의욕도 생기지 않았다. 죽음을 그저 삶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면 모든 게 깨끗이 끝났다. 그는 사람이 죽으면 우는 새, 귀촉도를 떠올렸다. 귀촉도는 영원한 세계인 저승과 일시적인 세계인 이승을 이어주는 매개였다. 그러나 그는 서정주 때문에 가슴이 내리 눌리는 듯했다. 서정주는 일본 천황을 흠모하며 ‘친일 파시즘’을 찬양했다. 천황에게 통제받고 지시받기 원했으며, 끝내 자신의 강렬한 자아를 없앴다. 그는 시집 「귀촉도」를 내면서 친일로 전향했다. 현실 세계의 갈등을 제거하고, 현실에 맞서는 작가정신을 거세하며 천황에 집중했고, 삶과 죽음을 관장하는 절대적인 존재로 천황을 내세웠다. 서정주는 해방이 되자 이승만을 다시 귀촉도의 자리에 놓았다. 청산하지 못한 친일이 남긴 뼈아픈 유산이었다. 서정주뿐만 아니라 많은 친일 반역자들은 처벌되지 않았고, 이들로부터 한국은 정경유착과 반자주화, 비민주와 반통일, 부조리와 부패의 온상이 됐으며, 조국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길 거부했던 숭일, 숭미가 판쳤다.
장준하는 서정주를 떠올리자 죽음에 대한 공포가 본능적으로 일렁였다. 사람은 결국 죽어 완전한 무로 돌아간다지만 그에게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아직도 할 일이 많았다. 헛되고 돌연한 죽음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김준엽을 끌어안고 얼어 죽지 않기 위해 아등아등 발버둥을 쳤다. 그러나 몰려오는 졸음은 참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은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고갯길을 데굴데굴 나뒹굴었다.
어느덧 어둠이 사라지고 서서히 동이 트기 시작했다. 장준하의 삶이 애처롭게 저물어 갈 즈음에 구름이 말끔히 걷히며 희번하게 태양이 솟아올랐다. 차츰차츰 떠오른 태양은 어느새 파촉령을 환하게 비추며 열기를 내뿜었다. 장준하는 눈을 떴다. 불게 타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면서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태양은 그가 비장하게 죽음과 맞서 싸우던 생의 의지였고, 피바다 위에 떠오르는 조국 해방의 기운이었다.
지난밤의 초한을 참아낸 일행도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태양을 쳐다봤다. 이들의 얼굴에는 이제 살았다는 안도감이 무겁게 묻어났다. 장준하는 자신과 같이 무지무지한 죽음의 고통을 견뎌낸 동지들이 고맙고 자랑스러웠다. 자신의 고통과 공포마저 모두 잊게 해주는 축복이었다. 그는 길게 휴 숨을 내쉬면서 다리에 힘을 주었다. 빠사삭거리는 눈 위를 걸어가는 시늉을 하며 또다시 이어질 행군을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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