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 - 장준하 일대기 121. 자주 국가를 꿈꾼 독립운동가 - 의암 선생 지묘

2026. 8. 25. 17:18ㆍ책/칼로 새긴 장준하

새벽녘에 진눈깨비가 조금 휘날리기는 했지만 하늘은 푸르고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4당수 회담이 끝나고 잔뜩 가라앉은 경교장에 밝은 기운과 운치를 더하는 날씨였다. 때마침 정원에서는 이름 모를 새들의 청아한 울음소리가 들렸고, 처마에는 밝은 햇살이 눈이 부시도록 쨍쨍하게 내리비췄다.


김구 주석 일행은 의암 손병희 선생의 묘소로 향했다. 여독을 풀 시간도 없이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여러 단체에서 주관하는 행사에 참여했지만 손 선생을 만나는 것만큼은 잊지 않았다. 이날 순방에는 삼일운동에 참여한 민족대표 33인 중 오세창, 권동진 선생이 동행했다.


오솔길을 따라 우이동 자락을 걸어 올라갔다. 발밑에서 낙엽 밟히는 소리가 와삭하며 들려왔다. 아직까지 나무에 매달린 낙엽은 스산한 바람에 밀려 오소소 떨어졌고, 바닥에 떨어진 낙엽은 제 몸을 굴리며 산 아래쪽으로 천천히 흩어졌다. 머리를 식힐 겸 고국산천에 한 번 나가보고 싶었던 장준하에게 더없이 정겨움을 선사하는 시간이었다.


산길을 시적시적 걸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두둑하게 흙을 쌓아 올린 묘지가 나타났다. 풀이 무성하게 자란 것으로 봐서는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듯싶었다. 김 주석은 꽃다발을 무덤 앞에 내려놓고 머리를 숙여 묵념했다. 오세창, 권동진 선생은 조국 독립을 보지 못하고 영면한 고인이 안타까웠는지 서럽게 호곡하며 눈물만 흘렸다. 차마 손병희 선생을 볼 면목이 없었다.


의암 손병희는 완벽한 자주 국가를 꿈꿔 온 독립운동가였다. 일본뿐만 아니라 미국과 소련, 중국조차 한반도에 발을 들여놓는 것을 완강하게 거부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한국은 자력으로 독립하지 못했고 해방과 함께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를 분할 점령했다. 손병희는 동학농민운동 때 농민군을 이끌고 전봉준과 함께 관군을 격파하며 서울로 진격했으나 일본군의 개입으로 실패하고 피신했다. 이후 최시형과 동학 교세 확장에 힘을 기울이다 일본으로 건너가 한국유학생을 도왔다. 그러나 같이 활동하던 이용구가 일진회를 만들고 자신의 이름을 넣은 을사조약 찬동 성명서를 내자 귀국해 진실을 밝히고 친일분자 62명을 천도교에서 출교 시켰다. 1906년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제3세 교주에 취임해 민족대표 33인으로 삼일운동을 주도하다 경찰에 체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