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7년 일본은 중일전쟁을 벌이기 위해 국가 총동원령을 발표하고, 1939년부터 조선인을 대거 입국시켰다.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에 유입된 조선인은 34만 명, 위안부로 끌려간 조선인 여성은 20만 명에 이른다. 재일조선인은 아이누족과 오키나와인과 함께 ‘부라쿠민’으로 불리며 가장 많은 차별과 폭행, 협박을 당했다. 이들은 강제징용으로 끌려와 주로 석탄이나 금속 광산에서 일했다.
김지연 사진가가 조선인들이 세우고, 이들의 자손들이 다니는 조선학교를 사진에 담아 책으로 냈다. 잇따라 전시회도 열린다.
“조선학교 문제가 한국에서는 소외돼 있는 데다 남북관계가 너무 좋지 않아서 더 어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출판사에도 제 뜻을 받아주시고, 갤러리에서도 초대전으로 동참해주셔서 고맙게 생각한다. 저의 힘은 미약하지만 공감대가 형성되는 것, 이것이 힘인 것 같다.”
재일조선인들은 짐승보다 못한 삶을 살았다.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살기 위해서 일했다. 일을 하지 않으면 죽도록 매를 맞았기 때문이다. 식량도 턱없이 부족해 매일 굶주림을 느껴야 했고, 배가 고파 먹을 것을 훔치다 걸리면 맞아 죽는 일도 빈번했다. 1945년 수많은 조선인들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원자폭탄을 맞아 죽거나 불구가 됐지만 일본은 이에 대한 사과나 의료보장을 하지 않았다.
일본의 70만 재일조선인들은 대부분 강제 동원된 징용자와 그들의 자손이다. 이들은 일본인들에게 갖은 차별과 핍박을 받으며 살아왔다. 지문날인과 외국인 등록증 상시 휴대 조치 등으로 범죄자 취급을 받았고, 정식으로 세금을 내면서도 투표권이 주어지지 않았으며, 유능한 젊은이라고 하더라도 정상적인 사회활동을 허락하지 않았다. 또한 재일교포 2세, 3세들은 한국인이라는 것이 드러나면 차별을 당하기 때문에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일본인 행세를 하는 일도 있었다.
그럼에도 김지연 작가의 사진 속 학생들은 밝고 강한 모습이었다. 검정치마저고리 차림으로 환한 미소를 짓는 소녀들. 아주 오래된 것처럼 보이는 흑백사진들 속의 소녀들은 2011년에 찍은 일본 ‘조선학교’ 소녀들이다.
“학생들 중에서 김령화라는 학생이 가장 인상에 남는다. 혼자 중학교 3학년이었다. 그 학생을 위주로 해서 학교가 돌아갔다. 그런 시스템도 고맙고, 학생의 굳은 의지도 대견했고, 부모님도 훌륭하셨다. 제가 학생에게 우문을 던졌다. 남한이 좋냐 북한이 좋냐. 학생은 ‘통일된 조국을 가고 싶다. 어디가 좋고 나쁜 게 없다’고 말하더라. 그런 말을 하는 한국 학생들이 과연 있을까. 감동이었다.”
조선학교는 재일조선인들이 한국의 민족성을 가르치고 배우기 위해 세운 일본 속 우리 학교다. 학생들은 국적은 일본도, 남한도, 북한도 아닌 조선적. 한반도가 남북으로 갈라지기 전의 국적을 그대로 유지하며 통일조국에 대한 강렬한 의지로 온갖 핍박을 견뎌내고 있다. 과거 일본의 이민자 정책에 따라 재일조선인들 중 상당수는 불이익을 받지 않기 위해 일본이나 한국, 북한 국적으로 전향했다. 현재 재일조선인은 조선적을 가진 조선인을 지칭한다.
조선학교는 한 때 500여 개의 학교에 57,000명의 학생들이 재학할 정도로 규모가 상당했다. 하지만 이제는 이제 불과 80여 개만이 남아있다. 김지연 작가가 사진으로 담은 도후쿠 조선초중급학교 역시 다른 조선학교들처럼 번성했지만 이제는 20여 명의 재학생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김 작가는 ‘디아스포라(세계 각국에 흩어져 살지만 자기 민족의 생활관습과 언어를 유지하며 사는 공동체)’를 주제로 재일조선인에 대한 작업을 하던 중 2011년 일본의 대지진이 발생했을 때 도후쿠조선초중급학교를 찾았다.
“3월 11일 대지진이 발생했을 때 문득 관동대지진이 떠올랐다. 지진 이후 무고한 동포들이 표적이 돼 무참하게 살해됐던 사건이다. 자연스레 어려운 상황 속에 외롭게 있을 조선학교 학생들이 생각났다.”
그는 서둘러 지진피해지역으로 향했다. 하지만 도후쿠학교까지 가는 여정은 쉽지 않았다. 그는 우여곡절 끝에 허가를 받고 도후쿠학교에 들어가서 지진으로 더욱 피폐해진 땅에서도 여전히 피어있는 들꽃 같은 아이들을 만났다.
“지진 피해 지역까지 들어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조선학교도 한국 사람들이 들어가는 것에 폐쇄적이었다. 하지만 지진이 일어나자 이데올로기 떠나 함께 돕고 지원하는 마음이 모아졌다. 조선학교 측에서도 마음을 열어주었다. 조선학교에 들어가 생활하는 동안 한국 사람에 대한 편견도 없어졌고, 연대할 끈도 형성하게 됐다.”
일본 내에서 정규 학교로 인정받지 못한 조선학교는 대지진 이후 학교보수비용을 지원받지 못해 학생들이 살던 기숙사를 임시교실로 꾸려야 했고, 그 임시교실은 아예 교실이 돼 버렸다. 김 작가는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조선학교의 아이들은 이렇게 노래한다고 전했다.
“대지는 흔들려도 웃으며 가자, 손잡고 가자, 웃으며 당당하게 가자.”
김지연 사진작가는 몇 되지 않은 우리나라의 여성 다큐멘터리 작가이기도 하다. 김 작가는 우리가 몰랐거나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있는, 우리의 양심과 우리 시대의 외곽에 집요하리만치 정열을 쏟는다. 이를테면 탈북 청소년들, 까레이스끼, 위안부 할머니, 외국인 노동자 등에 관한 이야기다. 그가 이렇게 시대와 역사, 민족의 문제에 천착하게 된 이유는 첫 경험 때문이다.
“처음 일본 위안부 할머니 작업을 하면서 눈을 떴다. 이후부터는 우리 민족과 역사에 관련된 아이템들만 눈에 들어왔다. 여태까지 작업해온 것이 모두 민족과 관련된 것이다. 다음 작업은 사할린 동포에 대한 얘기를 하려고 한다. 이런 일들이 다시는 우리 역사에서 벌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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