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6 - 장준하 일대기 062. 살아남기 위한 뜀박질 - 무의식 속의 구보

2026. 8. 26. 14:52ㆍ책/칼로 새긴 장준하

장준하 일행은 중국군을 따라 흙먼지가 풀썩거리는 길을 터벅터벅 걸었다. 아이들과 밀가루를 실은 수레를 밀고 끌며 바퀴가 달캉거리는 소리에 맞춰 발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드문드문 보이던 인가가 사라지고 눈앞에 허허벌판이 펼쳐졌다. 몸 하나 숨길 곳 하나 없는 황량한 광야였다. 혹시라도 한국인이라는 것이 발각되면 모두 죽음이었다. 장준하는 금방이라도 총알이 날아와 심장에 박힐 것 같아 조마조마했다.

이미 활시위는 당겨졌다. 다시 마을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장준하는 중국군에 몸을 맡기고 어금니를 물었다. 예고 없이 닥쳐올지 모르는 불행을 떠올리지 않기로 했다. 이미 중국군과 일본군의 협상은 끝났다. 검문도 없을 것이고, 똑같은 군복을 입은 사람 중에서 한국인을 꼬집어 내긴 어려웠다.

평한선 철도가 가까워지자 갑자기 앞에서부터 중국군이 뛰기 시작했다. 장준하 일행도 일제히 중국군의 뒤를 쫓았다. 속도를 맞추지 못하면 낙오였다. 중국군이 속도를 높이자 수레를 끄는 사람들이 점점 뒤처졌다. 수레에 여럿이 달라붙어 밀고 끌었다. 수레는 행렬에서 멀어지지 않고 바싹 따라붙었다.

일행은 중국군의 뒤통수만 보고 무의식적으로 뛰었다. 오직 살아남아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달렸다. 인간은 위대했다. 처절한 격투와 극한 상황에서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질하는 것이 인간이었고, 전쟁 중에는 모든 이유를 막론하고 살아남는 것이 가장 현명한 생존법칙이었다. 일행은 목숨을 보존할 수 있다는 서글픔이 묘한 힘으로 작용해 쉬지 않고 뛰었다.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에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옷은 땀에 흠뻑 젖었다. 한겨울의 북풍이 오히려 시원하게 느껴질 정도로 숨차게 달렸다.

20km 정도를 뛰자 발바닥에 자갈이 밟히기 시작했다. 철도 근방에 이르렀다는 증거였다. 총을 들고 양 옆으로 사열한 일본군이 보였다. 조금만 더 뛰면 일본군의 총칼에서 벗어나 충칭으로 한걸음 더 다가갈 수 있었다. 장준하 일행은 벌렁대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일본군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후다닥후다닥 철도를 건넜다.

중국군은 철도를 건넌 뒤에도 계속해서 뛰었다. 장준하는 중간걸음으로 걸으면서 대열 후미로 왔다. 쫓아오지 못한 일행이 있는지 일일이 머릿수를 헤아렸다. 낙오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