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8. 26. 14:51ㆍ책/칼로 새긴 장준하
장준하 일행은 평한선 철도를 건넌 뒤 일본군 관할지역에서 벗어나자 천천히 중국군 대열에서 빠졌다. 중국군은 누가 행렬에서 이탈한지도 모르고 앞만 보며 뛰었다. 갑자기 내린 폭우에 죽을 둥 살 둥 도망치기 바쁜 개미떼 같았다. 일행은 20리를 걸어 산골짜기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은 겉으로 보기엔 평화로워 보였다. 잠자는 아이의 얼굴처럼 고요하고 포근했다. 그러나 이곳도 전쟁이 할퀴고 간 상처는 비켜갈 수 없었다. 간간이 전투기가 날아가는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피비린내는 살육의 전조가 야금야금 엄습했다. 주민들도 포성과 화마가 언제 닥칠지 몰라 두려움에 떨었다.
유순하고 마음씨 착해 보이는 한 노인이 마을 입구에 서 있었다. 노인은 마을의 보장(면장)이었다. 보장은 일행을 마중 나와 정정히 인사했다. 군복을 입은 중국군들이 반가울 리 없었지만 주민들의 안정을 부탁하기 위해 일부러 격식을 차렸다. 장준하는 마을의 보장에게 중앙군관학교의 서한을 보여주며 숙소를 부탁했다. 보장은 서한을 꼼꼼하게 읽은 뒤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자신들에게 해를 가할 군인들이 아니었다. 보장은 자기 집 헛간과 마당을 기꺼이 내어주었다. 일행은 오랜만에 밥을 지어먹었다. 평한선 철도를 건너기 전까지는 엄두도 내지 못할 평온의 시간이었다.
장준하는 원활하고 안정적인 행군을 위해 인원을 4조로 나눴다. 1조는 선발대였다. 일행보다 먼저 나서서 숙소를 잡고 취사를 담당하는 일을 맡았다. 위험요소를 확인하는 정탐 역할도 했다. 장준하는 중앙군관학교에서 취사 담당자였기에 선발대 대장이 됐다.
선발대는 수레에 밀가루를 싣고, 간단한 식량은 자루에 넣어 등에 짊어지고 새벽녘에 길을 나섰다. 장준하는 여장을 챙기면서 민족의 운명을 개척하는 심정으로 투철하게 정신을 무장했다. 선발대의 행보에 일행의 운명이 걸렸고, 그는 충칭으로 가는 시련 앞에 지혜와 양심, 인내를 시험받고 있었다.
예감은 딱 들어맞았다. 좀처럼 마땅한 숙소가 나타나지 않았다. 선발대는 걷고 걸었다. 입 한번 벙긋하지 않고 8시간을 걸어 어두컴컴한 산골짜기에 들어섰다. 일 년 내내 해가 들지 않아 침엽수만 자생하는 산이었다. 하늘마저도 찌푸려 대낮인데도 침침했다. 길은 울퉁불퉁해서 수레바퀴가 자꾸 바위틈에 끼었다. 선발대는 수레와 씨름하듯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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