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9. 9. 15:45ㆍ책/단편선
프롤로그 - 과거와 관계를 맺는 여정의 첫 시작
내 삶, 어디 틈새에 껴 있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과거로의 여행, 이 기이한 나들이는 궁금증과 의구심으로 가득한 세계였지만 단 한 번도 대화를 시도하지 않은 영역이었다. 가끔 막다른 곳에 다다랐을 때 간절한 기도나 영혼의 외침 정도는 했을지 몰라도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떠올리며 기록할 생각은 없었다. 내가 저지르거나 목도했던 고통, 횡포, 슬픔, 사회의 갖가지 부조리를 대면해야 하는 현실만으로도 벅찼다. 누군가에게 마음속 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민망했다. 가늠할 수 없고 종잡을 수 없는 세상에서 내 이야기가 뭐라고 굳이 꺼내놔야 할까 고민했다. 여기에 내 아버지의 이야기까지 덧붙이려니 마음이 더욱 무거웠다.
한동안 망설이다가 결심했다. 부끄럽지만 삶의 양면성을 긍정하고 용기를 냈다. 천천히 말을 걸어보고 지혜를 청하기로 했다. 자기 자신조차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불확실한 삶. 통렬한 반성을 떠나 과거의 진실과 마주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의미 있다. 창피한 줄도 모르고 자신만 옳다 우기며 사는 세상 아닌가.
나는 삶의 양면성을 긍정한다. 긍정의 밑바탕에는 공존과 공감이 자리 잡고 있다. 기쁨과 아름다움을 긍정한다면 슬픔과 더러움도 더러 긍정해야 한다. 그래야만 고독하고 쓸쓸한 삶을 이해하고, 어지러운 세상을 사는 힘도 낼 수 있다. 나는 삶의 양면성을 긍정하면서 타인과 관계를 맺어왔다. 관계는 내 모든 고민과 괴로움을 양산하는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했지만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끝까지 관계를 단절되지 않도록 방법을 모색해왔다. 결코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는 존재였고, 오히려 여러 관계 속에서 해답을 찾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 책은 삶의 양면성을 긍정하는 마음으로 과거와 관계를 맺는 여정의 첫 시작이다.
인내를 조롱하고 배반한 가족
장제스의 국민혁명군이 북벌운동을 전개하고, 일제가 만주를 집어삼키려고 구실을 만들 무렵. 조선은 이미 일제에게 강점당해 자주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었다. 1927년 8월 17일. 이연주는 중국 장춘에서 3남 2녀 중 2남으로 태어났다. 1927년 8월 17일은 호적에 기재된 생년월일이다. 그 시절 다들 그러했듯이 호적에 기재된 나이는 정확하지 않다. 실제 그의 나이는 호적 나이보다 두 살 정도 많다.
이연주는 내 아버지다. 나는 아버지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오르지 않는다. 지금 남아 있는 사진도 단 한 장뿐. 사실상 기억하는 게 거의 없다. 이 책의 내용은 대부분 어머니와 주변인들에게 귀동냥으로 들은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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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아버지, 그러니까 내 할아버지의 이름은 이정수다. 그는 중국 장춘 창장로 한복판에서 국밥집을 운영하며 세월을 버텼다. 본래는 장춘시 외곽에서 농사를 짓던 조선인이었으나, 변변치 않은 땅을 정리한 뒤 과감히 시내로 들어와 중국인 행세를 하며 장사했다. 그가 국밥집을 차린 까닭은 단 하나, 굶지 않고 살기 위해서였다. 당시 조선인들에게 삶이란 봉건 지주의 횡포와 일제의 약탈, 식민화의 그늘 속에서 허기와 싸우는 일상이었다. 부자나 상인, 일본 관리가 아닌 이상 모두가 배를 곯았다.
이정수는 한의약사의 아들이었다. 자식들을 모두 평양의 명문 사립학교에 보낼 정도로 남부러울 것 없는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주어진 운명에 안주하거나 호사를 즐기는 성격이 아니었다. 순한 인상과는 달리 속은 뚝심으로 굳어 있었고, 세상을 대하는 눈빛에는 늘 냉소가 깃들어 있었다.
조국이 강제로 빼앗긴 현실은 그의 반골 기질에 불을 지폈다. 울분과 절망, 삐딱했던 시선은 1919년 3.1운동에서 마침내 폭발하고 말았다. 그는 학우들과 함께 일경의 장벽을 밀쳐내고 거리에 뛰쳐나갔다. 손수 만든 태극기를 시민들에게 나눠주며 누구보다 큰 목소리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경찰은 이정수를 학내 만세운동 주모자로 지목하고 체포에 나섰다. 학교를 샅샅이 뒤지고 시내 검문검색을 강화하며 숨통을 조였다. 그토록 믿고 친하게 지냈던 친구의 밀고 때문이었다.
이정수는 일제의 검속을 피해 만주로 도망쳤다. 중국인으로 신분을 세탁하고 세상눈을 피해 숨어 살았다. 그 당시 만주나 연해주는 항일 독립운동의 거점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조직적으로 독립운동 단체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망설임 없이 평범한 중국인 농부의 삶을 택했다. 친구의 배신은 너무나 깊은 상처였고, 그 뒤로는 사람을 더는 믿을 수 없었다. 그놈이 그놈이고, 저놈이 저놈이었다.
이정수는 집 떠날 때 챙겨온 금붙이로 척박한 땅을 구입해 농지로 개간했다. 농사일은 수월치 않았다. 거칠고 메마른 흙에 물조차 충분하지 않았다. 농사짓는 기술도 형편없어 한 해 걸러 흉작이었다. 생활은 갈수록 어려워졌다. 구황작물이나 죽 한 그릇으로 끼니를 때울 때가 부지기수였다. 짬이 날 때마다 남의 밭일에 품팔이를 하고, 방앗간이나 벽돌공장에서 일해도 옹색한 살림살이는 나아지지 않았다. 그는 결단을 내렸다. ‘장사를 하자! 배를 곯지 않아도 되는 식당을 하자!’ 이정수는 농사일을 정리하고 장춘 시내로 나와 국밥집을 열었다. 자리를 잡은 뒤에는 중매로 소개받은 조선 여자와 결혼해 3남 2녀를 낳았다. 내 아버지는 이정수의 둘째 아들, 이연주다.

이정수는 장남, 창주를 유별나게 편애했다. 아무리 살림이 어려워도 창주만큼은 학교에 보냈고, 연주에게는 창주의 뒷바라지만을 해주길 바랐다. 연주는 이정수를 이해했다. 어려운 시절, 형이라도 제대로 배울 수 있어 다행이라고 여겼다. 자기도 학교에 가고 싶었지만 투정 부리지 않고 자족했다. 가끔 형에게 한글이나 한자, 학교에서 배운 걸 알려달라고 보채긴 했지만 크게 욕심내지 않았다.
세 살 아래인 남동생, 경주가 학교 갈 나이가 됐다. 이정수는 경주에게 책가방과 필기구를 사주었다. 경주가 입학하는 날에는 연주에게 식당 일을 맡기고 입학식에도 참석했다. 연주는 몹시 언짢고 슬펐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지.’ 하고 넘겼다. 오히려 자기가 하지 못한 공부를 남동생이라도 할 수 있어 기분이 좋았다.
연주는 식당 일이 버거웠지만 참고 견뎠다. 형제들이 모두 학교에 가고 없어도 가족들 앞에서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불어터진 작은 손을 일부러 감추며 손님들의 시중을 들었다. 그러던 어느 해 참아온 울분을 터뜨렸다. 이정수는 연주를 아예 없는 아들로 취급했다. 학교에 가지 못한 설움을 형제애로 변용하며 살아온 연주를 어루만져주지 못할망정 대놓고 박대했다. 옷도 형이나 동생들 것만 사 왔다. 연주는 화가 꼭뒤까지 치밀었지만 인내했다. 가족끼리 이까짓 일은 대수라는 식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생일날은 달랐다. 이정수는 연주의 생일날조차 다른 형제들의 선물만 들고 나타났다. 연주는 북받쳐 오르는 설움을 억누르지 못하고 대들었다.
“왜 내는 옷 안 사줍네까? 난 아버지 자식 아니요. 오늘 내 생인인데 왜 형제들 옷이요? 공부는 왜 나만 안 시킵네까?”
이정수는 말 못 할 사정이 잇는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두 눈을 끔벅거리며 외면했다. 연주의 외침을 무시하듯 어깨를 으쓱대며 거친 목소리로 말대꾸한 사람은 이정수의 아내, 그러니까 어머니였다.
“뭔 소리니? 넌 내 진짜 새끼 아니다. 거둬서 밥이라도 먹여주는 걸 감사해하라우.”
연주의 얼굴은 일순간 납빛처럼 창백하게 질렸다. 그토록 애타게 모정을 바랐던 여인은 어머니가 아니라 독설을 퍼붓는 악녀였다. 여태까지 보여줬던 그녀의 미소는 허울 좋은 가식이자 음흉한 속내를 감춘 가면이었다.
연주주는 한동안 꼼짝하지 못하고 방에 엎어져 있었다. 눈물로 끝없이 베갯잇을 적시며 신세를 한탄했다. 현재의 삶은 뿌리부터 거짓이었고, 인내하며 버텨왔던 세월은 배반으로 돌아왔다. 식당일을 하면서 겪었던 배고픔과 피로는 모두 가족이라는 이름의 탈을 쓴 헛된 영광일 뿐이었다.
연주의 가슴에 거대한 파도 같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불행한 운명에 대한 반항심, 조국을 향한 목 타는 그리움, 삶을 도둑맞은 듯한 가혹함이 동시에 고개를 쳐들었다. 세상이 허위와 오류로 가득 찬 것 같은 의심병이 일렁였고, 자기를 버린 친모와 독설을 퍼붓는 이정수의 아내가 머릿속에서 겹쳐지면서 여자는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망상에 사로잡혔다.
가족들은 연주를 대놓고 하인처럼 대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강도는 세졌다. 폭언은 잔인해졌고, 악의적인 처사도 도를 넘었다. 연주의 몸과 마음은 점점 지쳐갔다. 당장이라도 끔찍한 현실을 걷어차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세상 밖으로 뛰쳐나갈 궁리는 하지 않았다. 세상 밖은 정글이었고, 한창 전쟁 중이었다. 세상이 어지러울 때는 삶의 원망은 잠시 미뤄야 했다. 모진 삶의 진실과 마주하고, 극심한 외로움이 사무칠수록 마음속 심지를 더욱 준엄하고 굳건하게 다져야 했다. 연주는 한동안 침묵한 채 지냈다. 가족들의 냉랭한 태도, 형제들의 차가운 시선에도 소처럼 묵묵하게 서빙하고, 청소하고, 설거지하며 어린아이에서 조숙하고 거친 소년으로 탈바꿈했다. 마침내 세상에 더는 무서울 것이 없는 어른으로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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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중국 장춘의 번화가 창장로. 이정수가 운영하는 식당 앞에 두 살짜리 남자아이가 앉아 있었다. 옹알옹알 조선말을 쓰는 고려인 아이. 아이는 오랜 시간 동안 굶주린 채 방치돼 있었다.
이정수는 누군가 잃어버린 아이인 줄 알고 식당 안에 들여앉혔다. 아이는 사람들 손을 타서 그런지 낯선 사람이 안아도 거부하지 않았다. 홀로 놔둬도 울지 않았고, 밥도 주는 대로 잘 받아먹었다. 방구석에 얇은 포대기를 깔고 눕혀도 잘 잤다.
“버려진 걸까?” 몇 날 며칠이 지나도 아이의 보호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키워 달라고 아이를 두고 간 게 분명했다. 이정수는 버려진 아이라는 확신이 들자마자 고려인 아이를 둘째 아들로 거두고 이름을 연주로 지었다.
입양은 사랑의 선택은 아니었다. 이정수는 식당을 운영하는 동안 주위에서 마음씨 좋고 건실한 사람으로 존경받았지만 그 마음속에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친구의 배신으로 도망자가 된 뒤 눈앞의 이익만을 좇는 간상배가 돼 있었다. 이정수는 고려인 아이를 아들이 아니라 월급을 주지 않아도 되는 공짜 노동력으로 봤다. 장남의 심부름꾼 같은 아이, 무엇보다 식당 일을 맡겨놓고 부릴 종업원이 필요했다.
조국 땅을 밟고 머금은 눈물, 전쟁 피해 도착한 고려인 마을
일본은 1932년 식민지 만주국을 세우고 수도를 장춘시로 정한 뒤 조선인과 중국인을 차별적으로 통치했다. 1938년에는 국가총동원법을 시행해 강제로 군대와 공장 등에 동원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했다. 큰아들, 창주는 일제의 학도병으로 징집됐다. 전쟁터에 끌려가면 일본군 총알받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정수는 창주에게 상해로 건너가 숨으라고 했다. 하지만 이대로 창주가 없어지면 집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고초를 겪었다. 이정수 본인이 창주 대신 전쟁터에 끌려갈 수도 있었다.
이정수는 충혈된 눈으로 연주를 바라보면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는 듯했다. 이정수의 아내는 답답한 표정을 짓다가 입을 삐죽거리며 명령조로 연주에게 말했다.
“니가 형 대신 일본군 하면 안 되겠니? 사례를 하겠다마. 돈. 댕겨 오면 결혼도 시켜주고, 가게도 열어주고.”
연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천장에 매달린 전등만 멍하니 응시했다. 한참 무겁고 긴 침묵이 흘렀다. 그 시간 동안 그의 가슴속에 그나마 남아 있었던 소소한 감사와 자잘한 애정은 스멀스멀 사라져 갔다. 가족에게 가졌던 일말의 기대조차 부끄럽게 여겼다. 연주는 가족에게 이용당하다가 잊히기 전에 자기가 먼저 헌신짝처럼 가족을 버리겠다고 다짐했다.
창주는 집안의 불행을 자신이 모두 껴안겠다는 일념으로 징병에 응했다. 이후 그의 생사는 알 수 없었다. 탈영을 했다거나 총에 맞아 죽었다는 소문만 무성했다. 창주는 해방이 된 뒤에도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연주는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자마자 결단을 내렸다. 가족들과 완전히 인연을 끊기로 마음먹었다. 그 순간 연주의 마음속에는 여러 감정이 교차됐다. 슬픔, 분노, 두려움, 절망이 꿈틀거렸고, 정말로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떠날 수 있을지 걱정했다. 하지만 더는 이곳에서 살고 싶지 않았고, 살아남을 자신도 없었다. 연주는 어두운 새벽. 틈틈이 모아둔 노잣돈을 바지춤에 꼭꼭 감추고, 옷보자기 하나 걸머진 채 집을 떠났다. 가족들에게 그 흔한 작별 인사조차 남기지 않고 조선으로 향했다. 가족이지만 가족 같지 않았던 사람들. 떠난다고 해도 붙잡지 않을 것이고, 눈앞에 보이지 않아도 아무 일 없이 살아갈 사람들과의 작별 인사는 무의미했다. 품삯 한 푼 없이 식당에서 일했던 그동안의 노고 정도면 키워준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충분했다.
그날 이후 장춘 창장로 국밥집에서 일하는 연주의 모습은 볼 수 없었지만 그의 그림자는 여전히 드리워져 있었다. 이름도 사라지고 숨결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가 자라면서 겪은 아픔만은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영령처럼 맴돌았다.
연주는 평양으로 향했다. 조선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서 무작정 평양을 목적지로 정했다. 장춘에서 선양, 단둥을 거쳐 평양으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난했다. 연주는 경비를 아끼려고 간간히 차를 얻어 타며 온종일 걸었다. 식사는 간단히 고구마로 때웠고, 하늘을 지붕 삼아 노숙도 마다하지 않았다. 영육이 지쳐 견딜 수 없을 지경에 이르러서야 숙소가 딸린 주막에서 잠시 여장을 풀었다.
장춘을 떠난 지 십일 만에 압록강을 건너 신의주에 도착했다. 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들 모두 중국말이 아니라 조선말을 했다. 말로만 듣던 조선 땅이었다. 연주는 살아생전 고국 땅을 밟을 수 있어 감개무량했다. 언제 어디에서나 조선말이 들린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벅차서 눈물이 한가득 고였다.
한여름 무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온몸에서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연주는 선천에서 정주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주막에 며칠 머물기로 했다. 식량도 마련하고, 옷도 세탁하면서 여로를 정비할 필요가 있었다. 얼마나 헤매고 다니며 고생했는지 여지없이 거지꼴이었다.
연주는 주막에 머문 첫날 밤 따뜻한 음식을 먹고 세상모르게 곯아떨어졌다가 따끔거리는 통증에 잠에서 깼다. 침구에 서식하는 진드기에 물려 극심한 가려움을 느꼈다. 연주뿐만 아니라 큰 방에서 함께 자던 사람들 모두 옴이 올라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긁었다. 손가락 발가락 사이, 겨드랑이, 사타구니 같은 연한 살이 짓무르며 벌겋게 부풀어 올랐다. 사람들은 침구를 밖으로 내놓고 방을 깨끗하게 청소했다. 마당에서 발가벗고 폴짝폴짝 뛰면서 옷을 탈탈 털었다. 그리고 주막 주인장이 준 노루발풀액을 온몸에 바르고 알몸으로 잠을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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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는 평양에 도착한 뒤 작은 문간방을 얻어 잠자리를 마련하고 닥치는 대로 일했다. 배운 게 없고, 변변한 기술이 없어 일은 대부분 막노동이었다. 페인트칠도 하고, 삽질도 하고, 목수도 하고, 모래도 나르며 기술을 익혔다. 어깨너머로 배운 도둑일 치고는 쓸모가 있었다. 이때 일하면서 배운 기술들은 연주가 평생 생계를 이어가는 토대가 됐다. 특히 정미소에서 쌀가마를 옮기며 기계를 돌렸던 경력은 후일 방직공장에 취직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연주가 정미소에 취직한 건 전적으로 정미소 사장의 권유 때문이었다. 동네에서 성실하고 열심히 일하는 청년으로 인정받으면서 정미소 사장이 먼저 연주를 찾아와 일해 달라고 요청했다. 연주는 일꾼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우스갯소리를 자주 해 재밌었다. 성미는 호방하고 활기찼으며, 외모는 훤칠했고, 거뭇한 면도 자국과 점잖은 구레나룻이 남성미를 물씬 풍겼다. 정도 많고 마음 씀씀이도 따뜻했지만 바보스러울 정도로 남의 꾀에도 잘 넘어가 돈도 많이 떼였다.
정미소 일은 신났다. 떠돌이 생활을 끝낼 수 있는 정규직이었고, 기본적으로 일머리도 있어서 기분 좋은 칭찬을 자주 들었다. 연주가 더욱 신났던 이유는 정미소 사장의 막내딸 때문이었다. 막내딸의 얼굴은 희고 살결은 부들부들 예뻤다. 마음씨는 그다지 곱다고 볼 수 없었지만 손끝이 야무져 집안일을 똑소리 나게 했다. 연주는 막내딸을 좋아하는 속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장난스럽게 결혼하자는 말도 자주 했지만 실제로 결혼이 성사될 것이라고 믿진 않았다. 무일푼 고아에겐 언감생심이었다. 막내딸도 무서운 아버지 밑에 자란 탓에 불장난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정미소 사장은 막내딸을 좋아하는 연주의 의중을 눈치채고 야박하게 대못을 박았다. 두 사람의 결혼은 절대로 허락할 수 없다면서 다른 마음을 품으면 당장 해고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집안끼리 혼사를 논하던 시절, 얼굴도 모르는 사내에게 딸을 시집보내던 때였다. 두 남녀가 아무리 좋아해도 양가 부모들의 허락 없이 결혼은 불가능했다.
연주는 몇 달 후 자진해서 정미소를 그만뒀다. 새로운 삶을 찾아 따뜻한 남쪽으로 길을 재촉했다. 어차피 부모형제 없는 혈연단신. 언제든 가고 싶을 때 가고 싶은 데로 가면 됐다. 연주는 조선의 제일 곡창지대로 꼽혔던 전라남도 나주로 향했다. 정미소에서 배운 기술이 가장 잘 먹힐 곳이었다.
사실 연주가 정미소를 그만두고 나주로 급하게 떠난 이유는 군대에 가기 싫었고, 생명을 앗아가는 전쟁을 혐오해서였다. 자기가 고아가 된 이유도 전쟁 때문이라는 생각이 강해 도망치듯 전라도로 향했다.
해방 후 이북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북한 정권이 수립됐고, 세금 납부와 징병을 위한 호구조사가 대대적으로 실시된 뒤 연주에게 조선인민군에 입대하라는 영장이 날아왔다. 연주는 군인이 되고 싶지 않았다. 전쟁이 두렵고 무서웠다. 장춘에서 자라는 동안 사람들이 총칼에 죽어나가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면서 끔찍한 트라우마를 겪었다. 전쟁에서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오로지 짐승다움만 요구했다. 승리와 군림을 위한 내핍과 고통, 잔인과 굴종, 죽음과 절망을 강요했다. 인간의 생명도 개돼지보다 못한 취급을 받았다. 굶주림조차 달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살점이었다.
연주가 정착한 곳은 나주가 아니라 광주 송정리였다. 밤에 환하게 켜진 홍등가 불빛에 반해 송정리에 머물렀다. 송정리는 1913년 기차역이 생기면서 상업 중심지로 떠올랐다. 수많은 일본인들이 거주하면서 오까야마, 도야마 같은 호화 여관이 들어서고 가모가와, 아사히, 요시미아 같은 유곽과 식당, 선술집, 다방 등 유흥가가 밀집하면서 일대 환락가를 이뤘다.
오늘날 송정리에는 고려인 마을이 형성돼 있다. 1860년부터 1945년까지 항일독립운동, 강제동원 등을 이유로 구소련·만주 지역으로 이주한 고려인들이 고국으로 돌아와 하나둘씩 송정리에 자리를 잡았고, 우연인지 필연인지 연주 역시 고려인이었다.
내면의 폭력성을 들춰내게 한 한국전쟁
운명은 참으로 얄궂었다. 1950년 6월 25일, 연주가 송정리에 도착한 지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아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이듬해 연주는 송정리시장을 어정대다 군인들에게 붙잡혀 반강제로 제주행 배에 올랐다. 남한 정부는 북한의 남침 이후, 하루라도 빨리 병력을 충원하기 위해 수많은 청년들을 그러모아 제주 육군 제1훈련소로 보냈다.
서귀포 해변 모래밭에 맨몸으로 도열한 500명 남짓의 청년들이 입영 신체검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연주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평양에서처럼 징집을 피해 남쪽으로 도망치는 방법은 섬에서 통할 리 없었다. 사방이 모두 바다였다. 전장에 가지 않는 방법은 단 하나, 신체검사에서 불합격하는 것뿐이었다. 합격하는 순간, 약식 군사훈련을 받고 곧바로 전선에 투입됐다.
신체검사는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팔다리가 멀쩡하고, 총을 쏠 검지가 제대로 붙어 있는지만 확인했다. 폐결핵이나 심장병 같은 중병이 아니면 대부분 합격을 줬다.
병역판정관이 외쳤다.
“몸에 이상 있는 사람은 말하라.”
연주는 손을 들고 큰 목소리로 말했다.
“외불알입니다.”
주위에서 웃음이 터졌다. 판정관은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물었다.
“뭐라고?”
연주는 재차 대답했다.
“고자입니다.”
판정관은 연주를 세워놓고 직접 확인했다. 고환은 비대칭이었지만 분명 두 개가 있었고, 기능에도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연주는 태연하게 “남자 구실을 못합니다”라고 거짓을 늘어놓았다. 판정관은 잠시 망설이다 연민 어린 눈빛으로 불합격 처리를 했다.
그날 신체검사에서 떨어진 이는 단 세 명. 그중 남자 구실을 못한다는 이유로 면제받은 이는 연주 혼자였다. 연주는 제주에서 하룻밤을 묵고, 기쁨을 감춘 채 송정리로 돌아왔다. 그러나 민간인의 신분은 오래가지 않았다. 두 달 뒤 다시 징집영장이 날아들었다. 연주는 절망했다. 정육점 붉은 불빛 아래 매달린 고깃덩어리가 된 기분이었다. 누군가 먹고 싶을 때면 언제든 붉은 살점이 잘려 나가는 죽은 고기, 통증도 생명도 없는 식재료 같은 환상에 사로잡혔다. 연주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대성통곡했다.
이번에는 속임수가 통하지 않았다. 연주는 정규 군사훈련을 받았고, 체격이 건장하다는 이유로 헌병대로 차출됐다. 가장 싫어하던 임무, 병역 기피자와 탈영병을 잡아들이고 수용소에서 인민군 포로들을 통제하는 일이었다.
연주는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또래 청년들을 때려잡고, 끌고 가고, 총으로 위협하는 폭력을 반복하면서 내면에 숨겨져 있던 공격성이 드러나 괴로워했다. 조용하고 고독한 자아와 욕하고 폭력을 자행하는 자아가 충돌하면서 심각한 무기력과 허무에 빠졌다.
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정이 체결됐다. 미·소 군정이 그어놓은 삼팔선이 국경선으로 굳어지며 조국은 둘로 갈라졌다. 연주는 안도와 상실이 뒤섞인 마음으로 군복무를 마쳤다. 군에서 제대하는 기쁨은 있었지만 평양에 갈 수 없고, 그곳 사람들도 영영 볼 수 없을지 모른다는 현실 앞에서 가슴은 먹먹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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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는 전남방직에 기계공 보조로 취직했다. 기계나 공구를 정비하고 기름칠하는 일이었다. 정미소에 다니며 기계를 만진 경력을 인정받기도 했지만, 전쟁 통에 일할 만한 남자가 부족했던 이유로 손쉽게 직장을 얻을 수 있었다.
전남방직은 1929년 일제가 설립한 종연방직에서 시작됐다. 일제강점기에는 수탈의 아픔이 서린 군수업체였고, 한국전쟁 이후에는 10대 여공들의 애환이 깃든 섬유공장이었다. 연주는 자신의 성격과 정반대되는 여공과 교제했고, 결혼까지 했다. 말수가 적고 진지해 농담을 싫어하던 여공이 왠지 마음에 들었다. 결혼 후 15년을 거의 따로 살았지만 혼인신고를 마친 정식 부부는 맞았다. 이 여공이 바로 내 어머니, 도희다.
도희는 1929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외할아버지의 직업 때문에 전국을 떠돌며 살다가 홀로 전라도 광주에 내려와 전남방직에 취직했다. 한국전쟁으로 남북이 갈라지자 고향에 돌아갈 수 없게 되었고, 가족을 찾는 일도 포기한 채 악착같이 생업에 매달렸다. 도희는 하루 2교대로 12시간씩 일하며 돈을 모았다. 그러나 연주는 집에 들어오지 않고 밖으로만 떠돌았다. 도희는 연주 때문에 마음고생을 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꿋꿋하게 노동을 감내하며 가정을 지켰다. 당시 사회는 극도로 가부장적이었다. 여자의 인내는 당연시됐고, 남자가 놀러 다니거나 바람을 피워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생산직 여성에 대한 차별도 만연하던 시절이었다. 도희는 사실상 연주 대신 가장 역할을 했지만 주위에서는 ‘공장가시네’라며 천대했다.
연주는 술에 취해 방탕하게 살았다. 난봉꾼이나 다름없었다. 바람도 잦았다. 여자에 대한 신뢰가 없어 애인을 자주 바꿨고, 한 여자에게 애정을 주지 않아 동시에 여러 여자를 만나기도 했다. 도희와 결혼 후에는 달라져야 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다니던 직장도 때려치우고 일용직을 전전했다. 번 돈을 술 마시고 노는 데 썼다. 저축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마치 하루살이처럼 살았다.
어렸을 적 장춘에서 겪었던 비애가 연주의 감정과 의식을 삼키고 인생을 휘어잡아 버렸을까? 만약 한국전쟁이 발발하지 않았다면 괜찮았을까? 뒤틀린 가족사와 전쟁의 기억은 연주를 알코올에 의존하게 했고, 술은 슬픔을 키우고 증오를 부추기며 폭력으로 번졌다. 그러나 도희는 연주의 무관심과 방임, 가정폭력, 롤러코스터 같은 감정 기복에도 이혼을 요구하지 않았다. ‘이혼녀’라는 주홍글씨를 짊어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동거와 별거를 반복하다가 사십대 중반에 아이를 갖고 나서야 함께 살았다. 그때 태어난 아이가 바로 나다. 연주는 내가 태어난 뒤에도 제멋대로였다. 남편 구실도, 아버지 구실도 하지 않았다. 방탕과 방황은 멈추지 않았다. 다만 횟수가 줄었을 뿐, 술에 취해 외박하거나 도희를 힘들게 한 폭력은 끊이지 않았다.
도희는 나를 낳은 뒤 모아둔 돈으로 번화가 인근 주택가에 전셋집을 얻어 여관을 열었다. 여관은 숙박업이자 공간 임대업이었고, 임대업만큼 부가가치가 높은 사업은 드물었다. 숙박업으로 생활은 조금씩 안정됐지만 연주가 술값과 벌금, 병원비로 돈을 탕진해 살림은 여전히 빠듯했다.
덜어내지 못하고 살아온 삶
연주의 방랑은 조금씩 잦아들었다. 주위 사람들은 아들이 커가니 철들었다고 했지만 사실 몸이 좋지 않아 요양 겸 치료차 집에 머물며 소일거리로 집안일을 돕는 것뿐이었다.
오월의 따뜻한 햇살이 마당에 가득 내리쬐던 오후. 두다다다 군홧발 소리가 들리더니 총성이 귀청을 찢었다. 연주는 급히 지하실 작은 공간에 모포를 깔고, 공포에 질린 얼굴로 나를 내려 보내며 거듭 당부했다.
“나오라고 하기 전에는 절대 나오면 안 돼. 무슨 소리가 들려도 꼼짝하지 마라.”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을 겪어본 세대만이 느낄 수 있는 팽팽한 긴장감, 총칼의 위력을 경험한 사람만이 감지할 수 있는 지독한 불안감을 전혀 인지할 수 없는 초등학생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5.18 광주항쟁은 그렇게 시작됐다.
1980년 5월. 3만여 명의 계엄군이 광주에 투입돼 살육 잔치를 벌였다. 민주화를 외치며 거리로 쏟아져 나온 비무장의 시민들을 총으로 쏴 죽이고, 대검으로 찔러 죽이고, 진압봉으로 때려죽였다.
내가 살던 여관은 전남 도청과 전남대학교 병원이 가까웠다. 좀만 걸어가면 충장로와 금남로였다. 낮에는 사람들이 시위하는 소리가 들렸고, 밤에는 군인들이 소등하라고 대문을 걷어차는 굉음과 탕탕거리는 총소리가 요동쳤다.
계엄군이 광주에서 잠시 물러났다. 나는 이틀을 지하실에서 보내고 밖으로 나와 연주의 손을 잡고 전남대병원 오거리로 나갔다. 병원 앞에는 총에 맞은 젊은이들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얼굴과 가슴, 배에 총상을 입은 시신이 대부분이었고, 안면이 심하게 훼손된 경우도 있었다. 나는 두려움에 손을 부들부들 떨며 연주의 손을 놓지 못했다. 연주는 잠자코 내 손을 꼭 쥐어주었다. 자신이 평생 거부하고 두려워했던 전쟁의 참혹함을 아들에게 전해주려는 듯했다.
사람들은 외쳤다.
“김대중을 석방하라, 계엄령을 해제하라.”
힘이 좋아 보이던 여자는 핸드마이크를 들고 절규했다.
“전두환을 찢어 죽이자.”
며칠 뒤 나는 다시 지하실로 들어갔다. 간간히 총소리와 공중에서 헬기가 날아다니며 확성기로 방송하는 소리가 들렸다.
“폭도들은 자수하고 시민들은 집에서 나오지 말라.”
밤새 총소리가 들리더니 아침이 밝았다. 통행 제한이 해제됐고 휴교령이 풀렸다. 광주는 다시 시끄럽고 바쁘게 돌아갔다. 그러나 학교는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다. 선생님들은 분노에 찬 눈빛으로 한숨만 내실 뿐이었다.
연주는 별말씀이 없었다. 낯빛은 애절하고 비통했지만 입술을 꾹 다물었다. 술을 더 많이 마셨고, 집도 자주 비웠다.
나도 연주를 닮아 술을 좋아한다. 피가 무섭고, 내가 살아보니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연주가 이해된다. 술을 마시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던 세상, 그런 세상에서 옴짝달싹할 수 없었던 그의 약한 마음을 들춰내고 싶지 않다. 다만 연주가 가슴속에 깊이 각인된 비애를 관용했더라면, 생명의 유한성에서 운명적 비극성을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세상사의 부정과 부조리를 무의미함으로 초극했더라면, 갖가지 아픔들을 쌓아두지 않고 덜어 내며 살았더라면 어떠했을까 안타깝다. 그랬다면 아직까지도 적당히 술을 즐기며 살아계셨을 것 같은데, 부자간의 인연은 너무나도 짧았다.
연주는 객사했다. 그가 집 밖에서 무엇을 했는지 모르지만 그는 자신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내에게는 살갑게 대하지 않았어도 계엄의 공포나 주변의 불행에 무감각한 사람은 절대 아니었다. 길거리에서 쉽게 마주치는 평범한 사람들이 죽었다. 연주의 지인 중에도 총에 맞아 죽은 사람이 있었다.
상처 입은 영혼을 끝내 따뜻하게 위로해드리지 못한 게 아쉽다. 푹 꺼진 뺨조차 어루만져 드리지 못하고 하늘나라로 보내드리게 돼 가슴이 미어진다. 나도 이러한데 연주는 오죽했을까? 얼굴도 목소리도 모르는 부모님을 평생 그리워하며 살다 가셨으니까.
에필로그 - 그리고 어머니
이 글을 쓰며 잊혀져 가던 아버지를 다시 불러낼 수 있었고, 그 기억은 내게 깊은 울림으로 남는다.
어머니는 임종하기 전까지 외가에 관한 얘기를 나에게 절대로 하지 않았다. 내가 자라면서 봤던 생애가 어머니에 관해 말할 수 있는 전부다. 어머니는 말수가 없기도 했지만 말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전해 들은 얘기론 그 원흉은 연좌제였다. 연좌제는 1980년대부터 공식적으로 없어졌다. 하지만 평양 출신의 어머니는 자유 대한민국이라는 정체성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다. 아들의 앞날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죽을 때까지 가슴에 품고 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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